Rossum SP-1200 1년 사용기 — 소리 하나 때문에 감수한 것들
작년에 Rossum SP-1200을 좀 무리해서 샀습니다.
무리해서, 라는 말을 굳이 쓴 이유가 있습니다. 이건 스펙으로 설명이 되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12비트에 총 20초, 한 소리는 길어야 2.5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어느 무료 플러그인보다도 부족합니다. 그걸 알면서 샀고, 1년을 썼습니다.
그 1년 동안 확인한 것과 포기한 것을 정리해봤습니다.
① 왜 굳이 이걸 샀나 🎛️
진짜 1200과 가짜 1200. 위에 올린 쪽이 훨씬 가볍고, 훨씬 쌉니다.
원본 SP-1200은 1998년에 단종됐고, 지금 중고 시세는 웬만한 플래그십 몇 대 값입니다. Rossum SP-1200은 그 원본을 설계한 Dave Rossum 본인이 자기 회사에서 다시 만든 복각판입니다. 편의 기능을 얹어 현대화한 물건이 아니라, 그 소리를 그대로 살리는 쪽에 무게를 둔 기계예요.
제가 사고 싶었던 건 기능이 아니라 소리 하나였습니다. 90년대 붐뱁 앨범에서 들리던 그 질감이요. 플러그인으로 근처까지는 갔는데, 마지막 한 뼘이 계속 안 잡혔습니다.
② 그 소리는, 진짜로 났습니다 ✅
1년 쓰면서 가장 확실하게 확인한 게 이겁니다.
원본 소리의 피치를 올려서 샘플링한 다음, 1200 안에서 다시 내린다. 이렇게 하면 90년대 앨범에서 듣던 그 소리가 납니다. 근처까지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납니다.
원리 자체는 SP-1200 역사 글에서 다룬 45회전 트릭과 같습니다. 짧은 샘플링 시간을 아끼려고 빠르게 녹음해두고 느리게 재생하던 꼼수였는데,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열화가 음색이 됐던 거죠. 다만 글로 읽는 것과 손으로 해보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였습니다. 피치를 내리는 순간 소리가 무너지면서 앉는데, 그 무너지는 방식이 플러그인에서 들리던 것과 다릅니다.
💡 이 기계를 살 이유는 여기 하나뿐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입니다.
③ 채널 8개, 한 채널에 한 소리 ⚠️
여기서부터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MIX OUT으로 모든 채널의 소리를 한 번에 모니터링할 수 있는 건 편합니다. 문제는 채널 하나가 한 번에 한 소리만 낸다는 점이에요. 같은 채널에 여러 소리를 배정해두면 하나를 치는 순간 앞의 소리가 잘립니다.
하이햇 오픈·클로즈처럼 일부러 잘라야 하는 조합이면 이게 오히려 편합니다. 그런데 여러 소리를 샘플링해서 시퀀싱하려고 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어떤 소리를 어느 채널에 놓을지가 그냥 정리 문제가 아니라 편곡 문제가 됩니다. 킥과 베이스를 같은 채널에 뒀다가 서로 잡아먹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배치를 다시 짠 적이 여러 번입니다.
머리를 정말 많이 씁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90년대 프로듀서들이 다시 보였습니다. 이 제약 안에서 그 명곡들을 뽑아냈다는 게, 직접 해보니까 훨씬 대단한 일로 느껴집니다.
④ 트랙 개념이 없다는 것 📉
솔직히 제일 불편한 부분입니다.
요즘 기계에 익숙한 손으로 만지면 자꾸 걸립니다. 트랙 단위로 켜고 끄고, 따로 편집하고, 나중에 순서를 바꾸는 그 감각이 여기엔 없습니다. 시퀀싱을 조금만 복잡하게 가져가려 하면 금방 답답해집니다.
당시에 왜 MPC60을 쓰는 사람이 더 많았는지, 이 기계를 쓰다 보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MPC는 제약을 지워서 표준이 됐고, SP-1200은 제약이 그대로 남아서 개성이 됐어요. 소리를 얻는 대신 작업 흐름을 내주는 거래인 셈입니다.
⑤ 복각판이 실제로 달라진 부분 🔌
Filtered와 Unfiltered가 따로 적혀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여기서부터는 복각판만의 이야기입니다. 사기 전엔 별 기대를 안 했는데, 1년 써보니 이 부분이 생각보다 컸습니다.
🔹 저장이 SD 카드로 바뀌었습니다
원본은 3.5인치 플로피였습니다. 복각판은 SD 카드에 샘플과 시퀀스를 저장하고, 카드 안에서 폴더를 만들고 이름을 바꾸고 지우는 것까지 본체 앞면에서 다 됩니다. 컴퓨터를 안 거치고 정리가 된다는 게, 쓰다 보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집니다.
🔹 필터 아웃과 논필터 아웃이 아예 따로 있습니다
이게 제일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채널 하나마다 필터를 통과한 아웃과 통과하지 않은 아웃이 따로 나와 있습니다. 원본은 채널 아웃이 한 세트뿐이라 이걸 고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1번 채널 하나만 놓고 봐도 잭이 두 개입니다. 필터 걸린 소리가 필요하면 필터 아웃에서, 생 소리가 필요하면 논필터 아웃에서 받으면 됩니다. 필터 느낌이 마음에 안 드는 날은 여덟 채널을 전부 논필터 쪽에서 받아도 되고, 반대로 어떤 채널만 골라서 태워도 됩니다. 채널별로 소리 성격을 골라 담는 셈이죠.
🔹 다만 필터 쪽은 채널마다 성격이 다릅니다
필터 아웃으로 받을 때 얘기인데, 여덟 채널이 다 같은 필터를 쓰는 건 아닙니다.
・1~2번: 가변. 후면 슬라이더로 컷오프와 레조넌스 조절
・3~4번: 낮은 컷오프로 고정
・5~6번: 높은 컷오프로 고정
・7~8번: 필터를 안 거침
MIX OUT은 여덟 채널을 그냥 합칠 뿐 자체적으로 필터를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1~2번은 필터를 통과한 신호가 들어가니까 믹스에서 유독 어둡고 작게 들립니다. 처음엔 고장인 줄 알았습니다.
🔹 컷오프와 레조넌스를 만질 수 있습니다
1~2번 채널에 한해서, 후면 슬라이더 네 개로 컷오프와 레조넌스를 조절합니다. 채널당 두 개씩이에요.
클래식한 SP-1200 소리를 원하면 레조넌스를 완전히 왼쪽으로 내리고 주파수를 중간쯤에 두면 됩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원본에선 못 내던 소리가 나오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슬라이더가 일부러 뻑뻑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작업 중에 실수로 밀릴 일은 없더군요.
📌 참고로 펌웨어가 어느 정도 이상이면 TUNE/MIX/MULTI 버튼을 누른 채로 전원을 켜서 1~2번 채널의 필터 엔벨로프를 아예 끌 수도 있습니다. 화면에 "Filter Envs Off"가 뜨면 적용된 겁니다.
⑥ 그래서 1년 뒤, 지금은 이렇게 씁니다 🤔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 기계는 곡을 완성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적어도 제 작업 방식에서는 그래요. 트랙 개념이 없고 채널이 여덟 개뿐인 물건으로 곡 하나를 끝까지 끌고 가려면 감수할 게 너무 많습니다.
대신 소리를 만드는 도구로는 대체가 안 됩니다. 드럼이든 루프든 여기 한 번 통과시켜서 다시 받아오면, 다른 방법으로는 잘 안 나오는 질감이 붙습니다. 저는 요즘 그렇게 씁니다. 여기서 소리를 만들고, 조립은 다른 데서 합니다.
살까 말까 고민 중이시라면 질문은 하나로 충분합니다. 그 소리가 나한테 꼭 필요한가. 필요하면 다른 대안이 마땅치 않고, 그 정도는 아니라면 굳이 이 불편함을 살 이유는 없습니다.
⑦ Q&A 💬
Q. 플러그인으로는 정말 안 되나요?
방향은 잡힙니다. 비트 크러셔에 로우패스를 걸고 새추레이션을 약간 얹는 조합이 기본 레시피고, 12비트 샘플러 계열 플러그인도 여럿 있습니다. 취미로 그 느낌을 흉내 내는 데는 충분합니다. 다만 피치를 올렸다 내리는 그 과정까지 포함해서 비교해보면, 무너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Q. 20초면 실제로 뭘 할 수 있나요?
2.5초짜리 블록 여덟 개로 쪼개서 채널에 나눠 담는 구조입니다. 드럼 원샷 위주로 짜면 생각보다 버팁니다. 루프를 통째로 넣으려 들면 금방 바닥납니다. 원본이 10초였다는 걸 생각하면 두 배로 늘어난 건데,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들어가야 하는 양입니다.
Q. 원본과 복각판, 소리가 같나요?
원본의 아날로그 필터 칩은 지금 생산되지 않아서, 후계 칩을 새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설계자가 직접 관여했고 저는 차이를 못 느낍니다. 다만 원본을 오래 쓴 분들 중에는 미세한 차이를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날로그 부품은 같은 규격이라도 개체마다 조금씩 다르니, 그 정도 차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Q. 첫 샘플러로 살 만한가요?
말리고 싶습니다. 이건 목적이 뚜렷한 사람이 사는 두 번째, 세 번째 기계입니다. 샘플링과 시퀀싱을 처음 배우는 거라면 훨씬 덜 답답한 선택지가 많습니다.
오늘 내용을 한 줄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곡을 완성시켜주는 기계가 아니라, 소리를 만들어주는 기계입니다. 그 하나가 필요하면 대안이 없습니다."
혹시 이 기계 쓰시는 분 계신가요? 채널 배치를 어떻게 짜시는지 댓글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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