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발라드의 그 종소리 — 야마하 DX7과 FM
80년대 발라드를 틀어보면 거의 예외 없이 같은 소리가 깔립니다. 진짜 피아노는 아닌데 피아노 자리에 앉아 있고, 종처럼 맑게 울리다가 금세 사라지는 소리. 휘트니 휴스턴에도 있고 시카고에도 있고 국내 가요에도 있습니다. 처음 듣는 사람도 "아 이거" 하는 그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야마하 DX7이라는 한 대의 신디사이저에서, 그것도 1번 프리셋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이 기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십 년 가까이 팝의 배경음이 됐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FM이라는 소리 만드는 방식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하겠습니다.
① 소리를 만드는 두 가지 태도
그때까지 신디사이저는 대부분 한 가지 방식으로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빼기입니다.
먼저 배음이 잔뜩 들어 있는 두꺼운 소리를 만듭니다. 톱니파 같은 것이죠. 그다음 필터로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냅니다. 조각가가 큰 돌덩이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 형상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 방식을 감산 합성, 영어로 서브트랙티브 신시시스라고 부릅니다. 무그도 프로펫도 전부 이쪽입니다.
FM은 태도가 다릅니다. 빼지 않고, 흔듭니다.
소리를 내는 진동 하나가 있고, 그 진동의 빠르기를 다른 진동이 흔듭니다. 천천히 흔들면 우리가 아는 비브라토가 됩니다. 그런데 흔드는 속도를 사람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올리면, 흔들림으로 들리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배음 다발이 생깁니다. 재료를 깎아 형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두 개를 곱해서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쪽입니다.
이 차이가 소리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감산 합성은 따뜻하고 두툼합니다. FM은 유리처럼 맑고 금속성이 있습니다. 종, 전자피아노, 마림바, 하프시코드처럼 때리고 뜯는 소리가 FM에서 유난히 잘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What is FM Synthesis — 야마하 공식 설명 영상
② 오퍼레이터와 알고리즘
DX7 안에는 오퍼레이터라는 부품이 여섯 개 들어 있습니다. 오퍼레이터 하나는 사인파를 내는 발진기에 엔벨로프가 붙은 물건입니다. 그 자체로는 아주 밋밋한 소리만 냅니다.
중요한 건 이 여섯 개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입니다. 연결에는 두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
🔹 캐리어(carrier) — 실제로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를 냅니다.
🔹 모듈레이터(modulator) — 소리를 내지 않고, 캐리어를 흔들기만 합니다.
모듈레이터를 세게 걸수록 배음이 많아지고 소리가 날카로워집니다. 약하게 걸면 순한 소리가 됩니다. 여기에 엔벨로프를 물리면, 음을 치는 순간에만 배음이 확 늘었다가 곧 순해지는 소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 악기가 그렇게 울립니다. 종을 치면 처음엔 쇳소리가 나다가 서서히 맑은 여운만 남죠. FM은 이 움직임을 흉내 내는 데 아주 강했습니다.
여섯 개를 연결하는 조합을 야마하는 알고리즘이라고 불렀고, DX7에는 32가지가 준비돼 있었습니다.
③ 스탠퍼드 연구실에서 시작됐습니다
FM을 음악에 쓸 수 있다는 걸 알아낸 사람은 존 차우닝입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컴퓨터로 소리를 실험하던 중, 비브라토를 아주 빠르게 걸면 음색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1960년대 후반의 일입니다.
문제는 이걸 팔 곳이 없었다는 겁니다. 미국 악기 회사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1973년, 스탠퍼드는 이 특허의 사용권을 일본 야마하와 계약합니다. 대학 역사상 손꼽히는 수익을 낸 계약이 됐습니다.
야마하는 10년을 들여 이 이론을 칩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1983년 5월, DX7이 나옵니다.
④ 1,995달러가 만든 지각변동
DX7이 세상을 바꾼 건 소리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값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프로급 신디사이저는 수천 달러였습니다. DX7은 1,995달러였습니다. 싸다고는 못 해도, 그때까지 스튜디오에만 있던 물건이 개인 뮤지션의 손에 닿는 가격이 된 것입니다. 게다가 16음 동시 발음이 되고, 당시 막 정해진 규격인 MIDI가 붙어 있었습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20만 대 가까이 팔립니다. 신디사이저 역사에서 손꼽히는 판매량이고, 80년대 중반에 녹음된 상업 음반 중 DX7이 안 들어간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⑤ 그런데 아무도 프로그래밍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DX7은 이론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소리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실제로 자기 소리를 만든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이유는 조작 방식에 있습니다. DX7에는 노브나 슬라이더가 사실상 없습니다. 얇은 멤브레인 버튼과 작은 액정 화면 하나가 전부입니다. 파라메터 하나를 바꾸려면 버튼을 여러 번 눌러 항목을 찾아 들어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FM은 직관과 잘 맞지 않습니다. 필터를 열면 밝아지는 감산 합성과 달리, FM은 숫자 하나를 조금 바꿨을 뿐인데 소리가 완전히 딴 것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연주자는 프리셋을 그대로 썼습니다. 이것이 80년대 사운드가 유난히 균일하게 들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스튜디오가 같은 기계의 같은 프리셋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드문 예외가 브라이언 이노입니다. 그는 DX7을 깊이 파고들어 자기 음색을 만들었고, 그 소리로 앰비언트 음반을 냈습니다.
▶ Brian Eno - An Ending (Ascent) (1983, Apollo)
⑥ 프리셋 1번, E.PIANO 1
그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 것이 E.PIANO 1입니다. 로즈 전자피아노를 흉내 내려던 소리인데, 실제 로즈와는 다릅니다. 더 맑고 더 유리 같고 저음이 단단합니다. 흉내가 실패한 자리에서 새로운 악기가 태어난 셈입니다.
이 소리는 발라드의 기본값이 됐습니다. 지금도 어느 회사 신디사이저를 열든 "FM 피아노" 계열 프리셋이 들어 있고, 대부분 이 소리의 자손입니다. 기계 한 대의 프리셋 하나가 한 시대의 음색을 정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 소리가 실제로 어떻게 들리는지, 사용이 확인된 사례를 몇 개 걸어두겠습니다.
▶ Twin Peaks 메인 테마 (1990) — E.PIANO 1이 그대로 들립니다
▶ Sade - Smooth Operator (1984)
▶ Michael Jackson - Smooth Criminal (1987)
한 가지 덧붙이면, 이 획일성은 곧 반작용을 낳았습니다. 80년대 후반이 되자 사람들은 "DX7 소리가 지겹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에는 다시 아날로그 신스를 찾기 시작합니다. 기술이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한 순간에 취향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⑦ 지금 FM을 만져보려면
DX7 실물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은 더 편한 방법이 많습니다.
🔹 Dexed — 무료
DX7을 거의 그대로 재현한 무료 플러그인입니다. DX7용 음색 데이터를 그대로 읽어들일 수 있고, 무엇보다 여섯 오퍼레이터가 한 화면에 다 보입니다. DX7이 어려웠던 이유의 절반이 화면이었다는 걸 여기서 실감하게 됩니다. FM을 공부할 목적이라면 이걸 권합니다.
🔹 에이블톤 Operator / 로직 EFM1
DAW에 딸려 있는 FM 신스입니다. 오퍼레이터 수가 적고 구조가 단순해서 입문용으로 좋습니다. 이미 갖고 있다면 굳이 다른 걸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 Native Instruments FM8
DX7 계열을 현대적으로 확장한 제품입니다. 모듈레이션 연결을 격자로 그려 넣는 방식이라 알고리즘을 자유롭게 짤 수 있습니다.
🔹 코르그 opsix
FM을 실물 노브로 만지고 싶다면 이쪽입니다. 각 파라메터에 물리 노브가 붙어 있어서, DX7이 겪은 조작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한 물건입니다.
🔹 처음 만질 때 순서
알고리즘 하나를 고르고, 모듈레이터의 세기 하나만 천천히 올려보세요. 소리가 순한 상태에서 날카로운 상태로 넘어가는 지점이 있습니다. 거기가 FM의 성격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그다음에 모듈레이터 쪽 엔벨로프의 감쇠를 짧게 줄여보세요. 종소리에 가까워집니다. 이 두 가지만 익혀도 절반은 온 것입니다.
⑧ 감산 합성과 FM, 언제 뭘 쓸까
간단한 기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 두툼하고 따뜻한 소리, 넓은 패드, 굵은 베이스 — 감산 합성이 빠릅니다. 필터를 여닫는 것만으로 원하는 방향에 금방 도달합니다.
🔹 때리는 소리, 금속성, 종·전자피아노·벨, 유리 같은 질감 — FM이 압도적으로 잘합니다. 감산 합성으로 종소리를 만들려면 고생이 심합니다.
🔹 저음 — 의외로 FM 베이스도 강력합니다. 80년대 신스 베이스와 90년대 하드코어 계열의 굵은 베이스 중 상당수가 FM입니다. 배음 구조가 촘촘해서 작은 스피커에서도 존재감이 남습니다.
FM 베이스가 궁금하시면 이 두 곡이 가장 알기 쉽습니다. 둘 다 DX7의 BASS 1 프리셋입니다.
▶ a-ha - Take On Me (1985)
▶ Kenny Loggins - Danger Zone (1986)
수치를 외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만들려는 소리가 깎아서 나오는 소리인지 곱해서 나오는 소리인지 판단하는 감각입니다. 그 판단이 서면 도구는 알아서 정해집니다.
🙋 자주 나오는 질문
Q. FM이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정말 그런가요?
숫자로 접근하면 어렵습니다. 대신 알고리즘 하나를 정해놓고 모듈레이터 세기와 엔벨로프만 만지는 식으로 범위를 좁히면 금방 손에 붙습니다. 처음부터 32개 알고리즘을 다 이해하려 하면 지칩니다.
Q. DX7 실물을 중고로 사는 건 어떤가요?
소리는 여전히 좋습니다. 다만 액정과 배터리가 오래된 개체가 많고, 편집이 불편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소리만 필요하면 Dexed로 충분하고, 건반 감촉과 물성이 목적이라면 실물도 의미가 있습니다.
Q. E.PIANO 1을 지금 쓰면 촌스럽지 않나요?
그대로 쓰면 시대감이 확실히 납니다. 다만 그 시대감을 노리는 곡이라면 오히려 정확한 선택입니다. 촌스러움을 피하고 싶다면 소리를 조금 어둡게 만들고 코러스를 덜어내면 훨씬 요즘 것처럼 들립니다.
Q. 오퍼레이터가 6개인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겹칠 수 있는 층이 많다는 뜻입니다. 하나를 캐리어로 쓰고 다섯 개를 순서대로 물리면 아주 복잡한 배음이 나오고, 셋씩 짝지어 두 소리를 겹칠 수도 있습니다. 오퍼레이터가 적은 신스는 이 자유도가 낮습니다.
Q. FM은 왜 요즘 다시 자주 보이나요?
디지털 특유의 차갑고 정확한 질감이 다시 취향에 맞아졌기 때문입니다. 아날로그 흉내가 흔해질수록, 아날로그로는 안 나오는 소리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 한 줄 압축
감산 합성이 큰 소리를 깎아 형상을 만드는 방식이라면, FM은 두 진동을 곱해 없던 배음을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DX7은 그 방식을 1,995달러에 담아 80년대의 기본 음색을 정해버렸습니다.
혹시 DX7 소리가 들리는 곡 중에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댓글로 알려주시면 같이 들어봐요. 도움이 되셨다면 공감과 이웃 추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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