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U가 따라잡을 때까지 — UAD와 하드웨어 액셀러레이터의 역사
컴퓨터로 곡을 만들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순간이 있습니다. 트랙을 늘리고 플러그인을 하나 더 꽂는 순간, 재생이 툭툭 끊기기 시작하는 때요. 요즘은 웬만해선 잘 안 겪는 일이지만 2000년대 초반에는 이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나온 해결책 하나가, 이후 20년 넘게 프로 스튜디오의 표준 자리를 지켰습니다.
아버지의 회사를 되살리다
지금의 Universal Audio는 1999년에 다시 시작된 회사입니다. 원래는 1958년 빌 퍼트넘(Bill Putnam Sr.)이 세운 이름인데, 1970년대에 한 번 사라졌습니다. 그걸 아들인 빌 퍼트넘 주니어와 짐 퍼트넘이 되살렸어요.
출발점은 복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설계한 1176, 그리고 텔레트로닉스 LA-2A 같은 물건을 원래 도면대로 다시 만드는 일이었죠. 아날로그 하드웨어 회사로 문을 연 셈입니다. 그런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이들이 눈을 돌린 쪽은 소프트웨어였습니다.
소프트웨어가 던진 질문
UAD가 처음 내놓은 플러그인들은 전설 소리를 듣던 장비들의 모델링이었습니다. SSL 4000E 콘솔, Neve 1073 프리앰프, 1176 컴프레서. 하나같이 "이 소리를 내려면 정말 그 기계가 있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목록이었습니다.
당시 대안과 비교해보면 왜 그런 질문이 나왔는지 분명해집니다. SSL 콘솔 한 대는 사양에 따라 수십만 달러를 호가했습니다. 1176도 그 시절 기준으로 만만한 물건이 아니었고요. UAD 플러그인이 싸다고는 못 해도, 그에 비하면 자릿수가 다릅니다. 게다가 소프트웨어라 한 번 사면 트랙마다 꽂을 수 있습니다. 실물 1176을 여덟 대 사는 일과는 비교가 안 되죠.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이런 모델링은 정말 무겁습니다. 실제 기계에서는 아날로그 회로가 한꺼번에 처리하는 일을, 컴퓨터는 샘플 하나하나 순서대로 계산해야 하니까요. 콘솔 채널 스트립처럼 회로가 복잡한 물건일수록 연산량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납니다. CPU 성능이 해마다 좋아져도, 플러그인이 요구하는 양이 더 빨리 늘었습니다.
두 갈래 길
이 상황에서 플러그인 회사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모델링을 가볍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로를 전부 재현하는 대신 소리를 결정하는 핵심만 추려서 구현하는 방식이죠. Waves, iZotope, FabFilter 같은 회사들이 이쪽이었습니다. 별도 하드웨어가 필요 없으니 쓰는 사람은 컴퓨터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하나는 계산 자체를 다른 칩에 떠넘기는 것입니다. UAD가 고른 길이 이쪽이었어요. 2001년에 나온 UAD-1이 그 결과물인데, PCI 카드 안에 SHARC라는 오디오 전용 프로세서를 얹은 물건이었습니다. 플러그인이 무거운 연산을 할 때 메인 CPU 대신 이 칩이 받아내는 구조입니다.
장점은 명확했습니다. 쓸 수 있는 연산량에 여유가 생기니 회로를 더 충실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단점도 그만큼 명확했고요. 카드를 따로 사야 하고, 그 카드가 수백 달러였습니다. 그럼에도 프로 스튜디오들은 지갑을 열었습니다. 콘솔을 들이는 대신 카드 몇 장으로 그 소리에 근접할 수 있다면 셈이 맞았으니까요.
PowerCore — 판이 둘로 갈리다
여기까지만 보면 UAD가 시장을 독식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2001년, 덴마크의 TC Electronic이 PowerCore를 들고 나왔습니다.
기본 발상은 같았습니다. SHARC 칩을 얹은 카드에 플러그인 연산을 떠넘기는 방식이요. 다른 점은 생태계였습니다. PowerCore는 TC Electronic이 하드웨어 이펙터로 쌓아온 알고리즘을 그대로 플러그인으로 옮기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이 회사는 이미 System 6000 같은 물건으로 마스터링 스튜디오에서 이름이 있었고, 특히 리버브와 딜레이 쪽 평가가 좋았습니다.
한동안은 진짜 양강 구도였습니다. 가격도 PowerCore 쪽이 조금 눌러줬고, 번들로 들어오는 플러그인도 넉넉했습니다. 빈티지 기계의 질감이 필요하면 UAD, 공간계와 마스터링이면 PowerCore — 대충 이런 식으로 갈렸습니다.
UAD-2, 그리고 승부
균형이 깨진 건 2008년입니다. UAD가 UAD-2를 내놨어요. SHARC 칩이 빨라졌고, 카드 한 장이 감당하는 플러그인 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PCIe 카드뿐 아니라 노트북용 ExpressCard, 외장 새틀라이트까지 나오면서 쓸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넓어졌습니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습니다. 연산에 여유가 생기자 UA는 라이선스를 사들여 모델링 목록을 계속 늘려갔습니다. Neve, API, Manley, Ampex, Studer. 원 제조사 승인을 받은 에뮬레이션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UAD는 카드를 파는 회사가 아니라 그 플러그인들을 가진 회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아날로그 하드웨어를 만들던 곳이 플러그인 회사로 무게중심을 옮긴 겁니다.
PowerCore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2011년 초, TC Electronic은 PowerCore 라인의 생산 종료를 공식화했습니다. 액셀러레이터 시장에는 UAD만 남았습니다.
같은 걸 10년 먼저 해본 회사
사실 이 발상을 UA가 처음 한 건 아닙니다.
E-mu. SP-1200과 에뮬레이터를 만든 그 회사예요. 1993년에 크리에이티브에 인수된 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Digital Audio System'이라는 이름으로 오디오 인터페이스를 냈습니다. 0404, 1212m, 1820m 같은 PCI 카드들이죠.
여기 붙어 있던 게 PatchMix DSP라는 소프트웨어였습니다. 카드 위의 DSP로 모니터 경로에 이펙트를 거는 구조. 뒤에 나올 Apollo의 발상과 사실상 같습니다. 시기로 따지면 10년쯤 빨랐고요.
그런데 안 팔렸습니다. 물건이 나빠서는 아니었어요. 당시 리뷰는 오히려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걸린 건 다른 데 있었습니다.
제일 큰 건 맥을 지원하지 않은 점입니다. 드라이버가 윈도우 전용이었고, 맥 지원은 '준비 중'인 채로 끝났습니다. 프로 음악 작업이 맥에 몰려 있던 시절에 이건 그대로 타격이었습니다.
브랜드도 불리했습니다. 모회사가 크리에이티브였고 제품 라벨이 'Creative Professional'이었거든요. 사운드블라스터 만드는 회사가 내놓은 프로 오디오 카드. E-mu 쪽에서 "설계에 크리에이티브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굳이 해명하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초기 드라이버가 덜 익은 채로 나왔고, 윈도우 7용은 끝내 베타에서 멈췄습니다. PCI 슬롯 자체가 사라져가던 시기와도 겹쳤고요.
그리고 E-mu는 정리됩니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입니다. E-mu가 있던 곳이 캘리포니아 스캇츠밸리, Universal Audio 본사와 같은 동네예요. UA에는 E-mu 출신이 여럿 들어갔습니다. 창업자 데이브 로썸(Dave Rossum) 본인도 2015년에 UA에 Technical Fellow로 합류했다고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습니다. 그가 쓴 표현이 'ex-muons', 전직 E-mu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다만 순서는 정확히 해둬야 합니다. Apollo가 나온 게 2012년이고 로썸이 UA로 간 건 2015년입니다. 로썸이 Apollo를 만든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같은 동네에서 같은 문제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이 결국 한 지붕 아래 모였다, 그 정도가 사실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E-mu가 10년 먼저 들이받고 넘어진 자리에서, UA가 다시 시작합니다.
카드에서 인터페이스로
UA가 오래 품고 있던 그림이 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한 몸으로 만드는 것.
생각해보면 이 회사는 처음부터 양쪽에 발을 걸치고 있었어요. 1176과 LA-2A를 실물로 되살리면서, 같은 회로를 플러그인으로도 옮기고 있었으니까요. 남은 건 둘을 한 상자에 넣는 일이었습니다. 소리가 들어오는 입구에서부터 모델링이 붙어 있는 기계.
그게 2012년의 Apollo입니다. DSP를 카드에서 오디오 인터페이스 안으로 옮겨버린 거죠.
발상 자체가 영리했습니다. 어차피 녹음하려면 인터페이스는 사야 합니다. 거기에 DSP를 넣어두면 카드를 따로 사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어지죠. 나중에 Unison이라는 기능이 붙으면서, 프리앰프 모델에 맞춰 입력 임피던스까지 바꿔주게 됐고요.
그런데 이게 카드를 옮겨 심은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녹음할 때 쓸 수 있는 방식이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플러그인을 건 소리를 그대로 녹음하는 것. 1176과 콘솔 프리앰프를 통과한 소리가 그대로 파일에 찍힙니다. 흔히 프린트한다고 하는 방식이죠. 되돌릴 수 없는 대신 나중에 만질 일이 줄어듭니다.
다른 하나는 소리 자체는 깨끗하게 녹음하면서, 부르는 사람이 듣는 모니터에만 플러그인을 거는 것. 파일에는 아무것도 안 걸린 소리가 남으니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만질 수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한지는 녹음을 직접 해보면 알게 됩니다.
컴프가 기분 좋게 걸린 소리를 들으면서 부르면 보컬리스트가 노래를 더 잘합니다. 자기 목소리가 앞으로 나와 있으니 밀 자리와 뺄 자리가 훨씬 선명하게 잡히니까요. 리버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른 소리로는 어색해서 제 실력이 안 나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컴프와 리버브까지 파일에 그대로 박아버릴 수는 없습니다. 듣기엔 걸려 있고 녹음되는 건 깨끗한 상태, 이게 필요한 건데 Apollo는 그걸 지연 없이 해줍니다. 결국 Apollo가 파는 건 플러그인 개수가 아니라 이 상태입니다.
Apple Silicon이 판을 흔들다
그리고 2020년, Apple이 M1을 내놨습니다.
멀티코어 성능과 전력 효율이 동시에 올라갔고, 음악 작업처럼 코어를 고르게 쓰는 일에 특히 잘 맞았습니다. M1에서 M2, M3로 세대가 넘어가는 동안 노트북 한 대가 감당하는 플러그인 수가 계속 늘었습니다. Intel과 AMD도 뒤따라 코어 수를 밀어 올렸고요.
결과적으로 액셀러레이터는 필수에서 선택으로 내려왔습니다. UA도 이걸 알고 있어서, 지금은 카드 없이 CPU로 돌아가는 네이티브 버전을 함께 팔고 있습니다. 자기 사업의 전제를 스스로 접은 셈이죠.
16코어에서 8코어로
저도 쓰던 사람입니다. PCIe 카드도 썼고 Thunderbolt 새틀라이트도 있었어요. 한때는 코어를 16개까지 늘려놨었습니다. 트랙이 쌓이고 콘솔 계열을 여러 개 꽂다 보면 그 정도는 금방 찹니다.
정리한 건 Apple Silicon이 나오는 걸 보고 나서입니다. 이건 흐름이 바뀌겠다 싶어서 거의 부랴부랴 팔았습니다. 중고 시세가 더 빠지기 전에 움직인 셈인데, 지나고 보니 타이밍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8코어만 남겨두고 씁니다. 카드를 아예 정리하지 않은 건, 없애보니 아쉬운 자리가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만 예전처럼 전부 카드로 돌리지는 않습니다. 무거운 것 몇 개만 카드에 얹고 나머지는 네이티브로 돌리는 식으로 나눠 씁니다.
이 분담이 생각보다 편합니다. 카드 코어가 꽉 차서 플러그인이 안 열리는 상황이 사라졌고, CPU 쪽도 예전만큼 몰리지 않습니다. 지금 UAD를 고민하는 분이라면 전부 카드로 해결하려 들기보다, 이 정도 선을 잡는 편이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금 사야 하나
큰 흐름만 보면 액셀러레이터를 따로 살 이유는 해마다 줄고 있습니다. 다만 UAD 플러그인을 실제로 많이 쓰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그 경우엔 여전히 나쁜 선택이 아닙니다.
스튜디오를 운영하거나 엔지니어링이 업이라면 아직 값어치가 있습니다. 수십 채널을 실시간으로 돌리면서 낮은 레이턴시를 유지해야 하는 자리라면, 연산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그대로 체감됩니다.
비트 메이커나 프로듀서라면 대부분은 없어도 됩니다. 요즘 맥북 한 대면 대체로 충분해요. 다만 무거운 모델을 늘 물고 사는 편이라면, 저처럼 작게 하나만 남겨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라이브를 한다면 다시 볼 만합니다. 연주 중에 플러그인이 밀리면 그대로 사고니까요. 성능이 아니라 안정성에 돈을 쓰는 셈입니다.
Windows를 쓴다면 조금 더 유리한 편입니다. 다만 요즘 라이젠 상위 칩이면 여기도 꽤 버팁니다.
오디오 인터페이스도 같이 고민 중이라면 저는 Apollo를 권합니다. 어차피 인터페이스는 사야 하는데 앞서 말한 모니터링이 그대로 딸려옵니다. 카드를 따로 붙이는 것보다 이쪽이 먼저입니다.
가격도 같이 봐야 합니다. 카드값보다 플러그인값이 더 무섭습니다. 콘솔 채널 스트립 하나가 수백 달러고, 쓸 만큼 모으면 컴퓨터 한 대 값이 나옵니다. 정가로 사는 사람이 드물고 세일을 기다리는 게 상식처럼 굳어진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나고 보니
2020년대 들어 UAD는 시장 한가운데에서 한 발 물러났습니다. 여전히 표준이긴 하지만, 이제 필수는 아닙니다.
나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드는 쪽에서는 고를 수 있는 게 늘어난 것이니까요. 비싼 하드웨어를 사야만 그 소리에 닿을 수 있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옛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Neve와 SSL 모델은 여전히 큰 스튜디오에서 돌아갑니다. 모델링이 정교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소리를 이미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죠. 오토튠이 나온 뒤에도 손으로 피치를 만지는 사람이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술은 대체로 선택지를 넓히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어디까지 갖출지는 결국 만드는 사람이 정하는 문제고요.
#DTM #음악제작 #홈레코딩 #UAD #플러그인 #하드웨어 #CPU #액셀러레이터 #디지털오디오 #기재역사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