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의 그 소리 — 반젤리스와 야마하 CS-80

비가 내리는 밤의 도시, 네온사인, 끝없이 높은 건물. 1982년 「블레이드 러너」의 첫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를 기억하실 겁니다. 웅장하게 깔리는데 오케스트라는 아니고, 신디사이저 같은데 당시의 신디사이저 소리와도 다릅니다. 사람이 숨을 쉬듯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합니다.

그 소리를 낸 건 한 대의 기계와 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마하 CS-80과 반젤리스입니다.

① 1977년, 야마하가 만든 괴물 🏭

기계 쪽부터 보겠습니다. CS-80은 1977년에 나왔고 1980년에 생산이 끝났습니다. 딱 3년이죠.

스펙부터 보면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입니다. 8보이스 폴리포니에, 각 보이스마다 독립된 두 층이 있어서 두 가지 음색을 겹칠 수 있었습니다. 앞면 패널에는 각 층의 파라메터가 따로 다 나와 있고요. 프리셋 22개와 사용자 저장 4개를 지원했는데, 이 저장이 디지털 메모리가 아니라 아주 작은 가변저항 뭉치였습니다. 노브 대신 미니 슬라이더를 손으로 맞춰놓는 방식이죠.

가격이 압권입니다. 미국 6,900달러, 일본 128만 엔. 1977년 기준입니다. 자동차 한 대 값이었어요.

그리고 무거웠습니다.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물건이라 투어에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건이 지금까지 이야기되는 이유는 이 스펙표에 없습니다.

② 왜 특별했나 — 손가락마다 따로 반응한다 🎹

가격도 무게도 아니고 건반 쪽입니다.

🔹 벨로시티 — 세게 누르면 크고 밝게, 약하게 누르면 작고 어둡게. 피아노처럼요. 1977년에 이건 흔하지 않았습니다

🔹 폴리포닉 애프터터치 — 이게 핵심입니다. 누른 뒤에 더 눌러 넣으면 소리가 변하는 걸 애프터터치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건반은 누른 건반 전체에 하나의 값만 보냅니다. 화음을 잡고 한 손가락만 더 눌러도 전체가 같이 변해요. CS-80은 건반 하나하나가 따로 압력을 감지했습니다. 화음을 잡고 가운데 음만 밀어 넣으면 그 음만 앞으로 나옵니다

🔹 리본 컨트롤러 — 왼손 쪽에 긴 띠가 있어서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피치가 미끄러집니다. 게다가 폴리포닉이라, 화음을 누른 채로 통째로 휘게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뭐가 되냐면, 손가락 하나하나로 각 음을 따로 연주하게 됩니다. 관악기 주자가 한 음씩 숨을 넣었다 빼는 것처럼요. 반젤리스의 음악에서 화음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들리는 이유가 이겁니다. 시퀀서로 찍은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밀고 당긴 겁니다.

▶ Yamaha Synth Space History | CS-80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반은 그것을 끝까지 쓸 사람을 만나야 의미가 생깁니다. CS-80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③ 반젤리스는 이 기계를 "유일한 진짜 악기"라고 불렀다 🎼

그리스 출신 작곡가 반젤리스는 1977년 앨범 「Spiral」에서 CS-80을 처음 쓴 뒤, 평생 놓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대부분에 걸쳐 그의 주력 악기였어요.

본인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자기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신디사이저이고, 지금까지 나온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설계 중 최고라고 했습니다. 제대로 연주하려면 연습이 많이 필요하지만 그건 이것이 진짜 악기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신디사이저이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주로 건반에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는 이 기계를 "좋은 음색이 들어 있는 상자"로 본 게 아니라 연주할 대상으로 봤던 겁니다.

▶ Vangelis — Chariots Of Fire

1981년 영화 「불의 전차」 주제곡입니다. 멜로디를 들어보시면 음 하나하나의 세기가 미묘하게 다르고, 길게 끄는 음은 뒤로 갈수록 소리가 열립니다. 건반을 누른 뒤에 손가락에 힘을 더 주고 있는 거예요.

이 연주법이 한 편의 영화를 통째로 떠받치게 되는 것이 그다음 해입니다.

④ 도시를 소리로 지었다 🌃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나옵니다.

리들리 스콧이 만든 그 도시는 미래인데 낡았고, 화려한데 축축합니다. 반젤리스가 붙인 음악도 그랬습니다. 웅장한데 슬프고, 전자음인데 따뜻해요. 오케스트라를 쓰지 않고 그 규모를 만들어낸 게 대단한 부분입니다.

▶ Vangelis — Blade Runner

들어보시면 소리가 한 덩어리로 밀려오는 게 아니라, 안에서 여러 층이 각각 다른 속도로 움직입니다. 폴리 애프터터치로 화음 안의 음들을 따로 밀어 넣으면 이렇게 됩니다.

📌 그 소리가 유행이 된 뒤

이후 SF 영화 음악은 오랫동안 이 방향을 따라갑니다. 지금도 "블레이드 러너 같은 소리"라고 하면 다들 같은 걸 떠올리죠. 한 대의 신디사이저와 한 사람의 연주가 장르 하나의 기본값을 정한 셈입니다.

그런데 그 기본값이 된 소리를 정작 음반으로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⑤ 사운드트랙이 12년 늦게 나온 이야기 💿

영화는 1982년에 나왔는데, 반젤리스가 실제로 연주한 음악이 담긴 정식 앨범은 1994년에야 나왔습니다. 6월 6일 발매였어요.

그럼 1982년에 나온 사운드트랙 앨범은 뭐였냐면, 다른 악단이 오케스트라로 다시 연주한 버전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들은 그 소리가 아니었던 거죠.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음반을 산 사람들이 전혀 다른 걸 듣게 된 셈입니다.

정작 반젤리스 본인의 녹음은 1981년 12월부터 1982년 4월까지 런던의 자기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어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게 12년을 기다린 뒤에야 공식적으로 풀렸습니다.

그 사이에 해적판이 돌아다녔고, 팬들 사이에서는 "진짜 사운드트랙"을 구하는 게 하나의 문화가 되기도 했습니다.

구하기 어려웠던 건 음반만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낸 기계 쪽은 더 심했어요.

⑥ 왜 아직도 복제가 안 되나 🔬

CS-80은 지금까지도 전체를 그대로 복제한 하드웨어가 없습니다. 필터 섹션만 따로 복각한 제품이나, 구조에서 영감을 받은 랙 신디사이저는 나왔지만 통짜 클론은 없어요.

이유는 대략 이렇습니다. 보이스마다 회로가 통째로 두 벌씩 들어가는 구조라 부품 수가 어마어마하고, 건반의 압력 감지 구조 자체가 지금 기준으로도 만들기 까다롭습니다. 게다가 개체마다 소리가 미묘하게 달라서 "그 소리"라는 게 하나로 정해지지도 않고요.

그래서 접근은 대부분 소프트웨어 쪽에서 이뤄졌습니다. 2003년에 아투리아가 CS-80 V를 내놓은 것이 시작이고, 이후에도 여러 회사가 각자의 방식으로 모델링을 내놓았습니다. 2015년에는 야마하가 미니 건반 크기로 CS 계열을 되살린 reface CS를 내기도 했고요.

AR
🛒 아투리아 공식 (소프트웨어 직판)
CS-80 V
CS-80 을 모델링한 소프트 신디사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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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
🛒 기어라운지 — 야마하 신디사이저 국내 정식 수입사
YAMAHA Synthesizers
reface 시리즈를 포함한 야마하 신디사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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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
🛒 기어라운지 — 아투리아 국내 정식 수입사
Arturia
키랩·미니프리크 등 아투리아 하드웨어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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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중고 실기 가격은 계속 올라갑니다. 신디사이저 중에서 가장 비싼 축에 드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기계를 통째로 되살리는 건 이렇게 어려운데, 정작 그 핵심이었던 연주 방식은 다른 경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⑦ 그 표현력이 지금 돌아오고 있다 🔄

폴리포닉 애프터터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건반 하나하나를 따로 제어한다는 발상이 MPE라는 규격으로 정리되면서, 이걸 지원하는 컨트롤러와 플러그인이 늘었습니다. 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 그 음만 밝아지고, 좌우로 흔들면 그 음만 비브라토가 걸리는 식이죠. 40년 전 CS-80이 아날로그 회로로 하던 일을, 지금은 디지털 규격으로 하고 있는 셈입니다.

📌 실기가 없어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1. 패드나 스트링 음색을 하나 띄우고, 화음을 그대로 찍습니다
2. 각 음의 벨로시티에 조금씩 편차를 줍니다. 다 똑같으면 기계 소리가 납니다
3. 화음 안의 한 음만 골라, 그 음에만 필터 컷오프나 볼륨 오토메이션을 겁니다. 다른 음은 그대로 두고요
4. 길게 끄는 음의 중간부터 아주 천천히 밝아지게 만듭니다. 사람이 숨을 밀어 넣는 속도로
5. 마지막으로 전체에 살짝 피치 흔들림을 줍니다. 아날로그 회로는 완벽하게 정확하지 않았으니까요

핵심은 화음을 한 덩어리로 다루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CS-80이 남긴 진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

반젤리스는 202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그 빗속 도시의 소리를 지금 다시 들어보면, 음색 자체보다 연주가 먼저 들립니다. 화음 안의 음 하나가 혼자 밀려 올라오고, 다른 음이 그 아래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는 식이죠. 그런 걸 할 수 있는 건반이 있었고, 그걸 진짜 악기로 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반도 사실 그런 물건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걸 악기로 안 다루고 입력 장치로 다룰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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