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쪽이 먼저 사라졌다 — JD-990과 JV-1080, 그리고 보드 한 장의 값

중고 장터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랙 음원 모듈 한 대가 20만 원 언저리에 올라와 있는데, 그 기계에 꽂는 확장 보드 한 장이 25만 원에 따로 팔리고 있었어요.

본체보다 부품이 비싼 겁니다. 그리고 그 부품은 회로가 아니라 8MB짜리 소리 덩어리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기까지 오는 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시작은 1년 사이에 나온 두 대의 기계입니다.

① 1993년과 1994년 🎚️

1993년, 롤랜드가 JD-990을 냅니다. 가격은 미국에서 2,195달러, 영국에서 1,445파운드. 이름에 "Super JD"가 붙었고, 앞서 나온 JD-800이라는 신디사이저의 랙 버전처럼 소개됐습니다.

정확히는 랙 버전이 아니었습니다. 기능이 너무 늘어나서 JD-800과 프리셋 호환이 안 됐거든요. 같은 이름을 쓰는 다른 기계에 가까웠습니다.

이듬해인 1994년, 같은 회사가 JV-1080을 냅니다. 2U 랙에 들어가는 음원 모듈이었고, 별명이 "슈퍼 JV"였어요.

두 대가 1년 간격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30년 뒤, 한쪽은 수집가가 찾는 물건이 되고 다른 한쪽은 20만 원대에 널려 있습니다.

널려 있는 쪽이 당대에 이긴 쪽입니다.

롤랜드 JV-1080. 90년대 스튜디오 랙에서 가장 흔했던 얼굴입니다

롤랜드 JV-1080. 90년대 스튜디오 랙에서 가장 흔했던 얼굴입니다 / 출처: Matt Perry /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② JD-990이 무엇을 더 가지고 있었나 🔬

스펙을 나란히 놓으면 JD-990 쪽이 초라해 보입니다.

🔹 동시발음 24보이스 (JV-1080은 64)

🔹 파트 7 + 드럼 1 (JV-1080은 16)

🔹 웨이브 ROM 6MB · 195개 파형 (JV-1080은 8MB)

🔹 확장 보드 1장 (JV-1080은 4장)

숫자만 보면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숫자에 안 잡히는 쪽에 JD-990의 전부가 있었어요.

🔹 링모듈레이션 — 두 오실레이터를 곱해서 금속성 배음을 만듭니다. 종소리, 유리 같은 소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 오실레이터 싱크 — 한쪽 파형이 다른 쪽을 강제로 리셋시킵니다. 찢어지는 리드 소리의 정체예요

🔹 FXM(주파수 크로스 모듈레이션) — 파형끼리 주파수를 흔들어서 불협에 가까운 배음을 얹습니다

🔹 직렬 듀얼 필터 스트럭처 — 필터 두 개를 겹쳐 씁니다. 대신 보이스를 2개 먹어요

🔹 매트릭스 모듈레이션 — 무엇이 무엇을 흔들지 자유롭게 연결합니다

🔹 아날로그 필 — 파형에 아주 미세한 피치 흔들림을 넣습니다. 옛날 아날로그 신디의 불안정함을 흉내 낸 기능이에요

🔹 LFO 파형에 사인·사다리꼴에 더해 카오스가 들어 있습니다

🔹 스테레오 4조, 즉 추가 4아웃

롤랜드 JD-990. 같은 회사가 1년 먼저 낸 쪽입니다

롤랜드 JD-990. 같은 회사가 1년 먼저 낸 쪽입니다 / 출처: Matt Perry /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정리하면 JD-990은 샘플을 재생하는 기계가 아니라 샘플을 재료로 쓰는 신디사이저였습니다. PCM을 오실레이터 취급하고 그 위에서 합성을 하는 구조였어요.

그 결과가 지금도 회자되는 패드와 필터 소리입니다. 페이스리스의 〈Insomnia〉에서 곡을 끌고 가는 그 피치카토 훅도 JD-990에서 나왔습니다. 프로디지, 아폴로 440, ATB, 클라우스 슐체, 반젤리스가 이 기계를 썼고요.

③ 그런데 시장은 1080을 골랐다 📈

JV-1080은 정반대 설계였습니다.

🔹 64보이스 16파트 — 곡 하나를 이 한 대로 덮을 수 있습니다

🔹 32비트 RISC 프로세서 66MHz 구동

🔹 8MB 안에 448개 샘플 — 어쿠스틱 악기, 베이스, 패드, 리드, 오르간, 합창, 드럼 키트

🔹 패치 하나에 톤 4개를 쌓고, 톤마다 필터·엔벨로프·이펙트를 따로 겁니다

🔹 확장 슬롯 4개, 다 채우면 42MB

합성 구조는 단순했습니다. 톤당 필터가 12dB/oct 한 종류뿐이고, JD-990에 있던 링모듈레이션도 오실레이터 싱크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이 기계에서 원한 건 소리를 깎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된 소리를 빨리 꺼내는 것이었거든요.

사용자 목록이 그걸 보여줍니다. 한스 짐머, 마이클 잭슨, 넵튠스, 폴 반 다이크, 디페시 모드, 반젤리스. 게임 음악 쪽에서는 그랜트 커크호프, 네이선 매크리, 안도 히로카즈, 나가타 켄타가 썼고, 가와이 켄지도 사용자 명단에 있습니다.

장르가 안 겹치는 이름들입니다. 영화 스코어와 유로댄스와 게임 BGM이 같은 랙 한 대를 쓰고 있었어요.

JD-990은 1996년에 단종됩니다. 3년을 못 채웠습니다. JV-1080은 2000년까지 살아남았고, 그사이 같은 엔진이 XP-50이라는 건반형 워크스테이션에도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④ 롤랜드가 판 건 기계가 아니라 호환성이었다 🔗

왜 1080이 그렇게 팔렸는가. 성능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나 잘 붙었기 때문입니다.

🔹 16파트에 GM 뱅크 내장 — 남이 만든 미디 파일을 그냥 열어도 소리가 납니다. 스튜디오에 받아온 데이터를 재생만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게 컸어요

🔹 엔진이 제품군을 가로지릅니다 — JV-1080의 음원부가 XP-50 워크스테이션에 그대로 들어갔습니다. 랙을 쓰던 사람이 건반으로 바꿔도 소리가 안 바뀝니다

🔹 보드가 기종을 가로지릅니다 — 같은 SR-JV80 보드를 XP-50·XP-60·XP-80·JV-1080·JV-2080·XV-5080에 꽂을 수 있고, JD-990에도 1장 들어갑니다

🔹 뒷세대가 앞세대를 흡수합니다 — XV-3080은 JV-2080의 소리를 전부 담고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롤랜드 제품을 한 번 사면 다음에도 롤랜드를 사는 게 합리적이 된다는 겁니다. 보드를 계속 쓸 수 있고, 데이터가 열리고, 소리가 이어지니까요.

경쟁 상대는 다른 회사의 더 좋은 기계가 아니라 이미 내 랙에 있는 것들과 얼마나 잘 맞물리는가였습니다. 그 싸움에서 롤랜드가 이겼습니다.

⑤ 기기별로 무엇이 다른가 🧩

계보를 한 번 정리해두면 중고를 볼 때 편합니다.

🔹 JV-880 — 1U짜리 작은 형제. 같은 계열의 입문 자리였습니다

🔹 JV-1080 (1994) — 2U, 64보이스 16파트, 슬롯 4개. 시리즈의 기준점

🔹 JV-2080 (1997) — 동시발음은 그대로인데 슬롯이 8개로 늘었습니다. 필터가 4종(로우패스·밴드패스·하이패스·피킹)으로 늘고, 이펙트 40종 중 3개를 동시에 겁니다. 패치 768개. 그리고 8대를 묶어 512성부까지 늘릴 수 있었어요

🔹 XV-3080 — 동시발음이 128로 뜁니다. 톤마다 스테레오 파형을 재생하고요. SRX와 SR-JV80을 둘 다 받고, 내부에 JV-2080의 소리 전부와 JD-990의 파형 모음이 들어 있습니다

🔹 XV-5080 — 플래그십. 128보이스 32파트, 웨이브 64MB, SRX 4장 + SR-JV80 4장 동시, SIMM 2슬롯에 최대 128MB. 그리고 롤랜드·아카이 라이브러리와 WAV·AIFF를 읽습니다. SCSI 내장, 8아웃에 S/PDIF와 R-BUS까지

마지막 줄이 중요합니다. XV-5080에 오면 음원 모듈이 샘플러 자리까지 넘어옵니다. 남의 회사 라이브러리 포맷을 읽어 들이는 데까지 갔어요.

⑥ SR-JV80이라는 발명 💾

이 시리즈의 진짜 상품은 본체가 아니라 보드였습니다.

SR-JV80은 장당 8MB의 PCM 웨이브와 그 소리에 맞춘 패치가 같이 들어 있는 확장 카드입니다. 10년에 걸쳐 22종이 나왔어요.

🔹 01 Pop / 02 Orchestral / 03 Piano / 04 Vintage Synth / 05 World

🔹 06 Dance / 07 Super Sound Set / 08 Keyboards of the 60s & 70s

🔹 09 Session / 10 Bass and Drums / 11 Techno / 12 Hip-Hop

🔹 13 Vocal / 14 Asia / 15 Special FX / 16 Orchestral II

🔹 17 Country / 18 Latin World / 19 House

🔹 97 Experience III / 98 Experience II / 99 Experience

목록을 보면 이게 무슨 사업이었는지 보입니다. 장르 하나에 카드 한 장.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면 02번을, 테크노를 하면 11번을, 힙합을 하면 12번을 사면 됐어요.

여기에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06번 Dance 보드는 저작권 문제로 롤랜드가 배포를 중단했습니다. 샘플 출처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롤랜드가 상세한 경위를 공개한 적은 없습니다. 여기서는 배포가 중단됐다는 사실까지만 적어둡니다. 이 글은 법적 판단이 아니라 공개된 사실을 정리한 것이니, 실제 권리관계가 걸린 일이라면 전문가에게 확인하시는 게 맞습니다. 그래서 이 보드는 지금도 중고 시장에서 별도 취급을 받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04번 Vintage Synth 보드입니다. 이 카드 안에는 JD-990 전용으로 따로 프로그래밍한 패치가 255개 들어 있습니다. 시장에서 밀려난 기계를, 시장을 가져간 기계의 보드가 챙기고 있었던 셈이에요.

JV-1080 안쪽. 이 자리에 카드를 네 장까지 꽂습니다

JV-1080 안쪽. 이 자리에 카드를 네 장까지 꽂습니다 / 출처: Raymangold22 / CC0 via Wikimedia Commons

⑦ 다들 같은 보드를 꽂았다 🌀

여기서 이 글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드를 판다는 건 "무슨 소리든 낼 수 있게 해준다"는 약속입니다. 22종이나 있으니 조합이 무수히 나올 것 같죠.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반대였습니다.

다들 같은 몇 장을 샀습니다.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사람은 02번을 샀고, 빈티지 신스 소리가 필요한 사람은 04번을 샀습니다. 그게 그 용도의 정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90년대 후반 드라마 BGM의 현악과 게임 음악의 오케스트라와 광고 음악의 패드가 같은 8MB에서 나왔습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좋은 소리가 담긴 카드가 있고, 그걸 사서 쓰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에요. 다만 모두가 합리적으로 선택하면 결과물이 수렴합니다.

지금 다들 같은 플러그인을 열고 같은 프리셋을 고른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현상은 새로운 게 아니에요. 30년 전에는 그게 카드 모양이었을 뿐입니다.

차이가 하나 있긴 합니다. 그때는 카드가 8MB였고 한 대에 네 장밖에 못 꽂았습니다. 지금은 용량 제한이 없죠. 제약이 사라진 만큼 수렴이 더 빨라졌을 뿐,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⑧ 본체보다 비싼 보드 💸

시세를 보면 그 8MB가 지금 어떤 대접을 받는지 나옵니다.

🔹 JV-1080 본체 — 46,618 ~ 68,690엔. 일 단위로 추적하는 곳 기준 평균이 약 268파운드고, 보드 없는 개체는 150~300달러 선입니다

🔹 SR-JV80-04 Vintage Synth 보드 한 장 — 187달러부터

🔹 SR-JV80-02 Orchestral 보드 한 장 — 58달러부터

04번 한 장이 본체 하나 값과 맞먹습니다. 슬롯 네 개를 인기 카드로 채우면 보드값이 본체값을 넘어갑니다.

"JV-1080이 요즘 다시 인기라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듣습니다. 절반만 맞아요. 오른 건 기계가 아니라 그 안에 넣는 소리입니다. 본체는 여전히 싸고, 사람들이 돈을 내는 쪽은 8MB짜리 카드예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본체는 그 소리를 재생하는 장치일 뿐이고, 사람들이 원하는 건 소리니까요. 롤랜드가 30년 전에 세운 구조가 지금 시장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보드도 소모품입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게 있습니다. 보드값이 본체값을 넘는다는 건, 그 보드가 살아 있을 때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SR-JV80은 ROM 칩과 소형 부품을 얹은 기판 한 장입니다. 30년 지난 기판이니 당연히 늙습니다. 중고로 도는 개체에서 자주 보이는 상태가 이렇습니다.

🔹 부품이 녹아내린 흔적 — 기판 위 소형 부품이 주변으로 갈색·흰색 자국을 남기며 번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액이 진행된 상태로, 그대로 두면 아래 배선까지 먹습니다

🔹 접점 산화 — 슬롯에 꽂히는 금속 단자가 흐려지거나 얼룩집니다. 소리가 나다 말다 하는 원인 1위

🔹 기판 변색·부식 — 보관 환경이 습했던 개체. 특히 오래 랙에 꽂힌 채 열을 받은 보드에서 나옵니다

🔹 핀 휘어짐 — 뽑고 꽂기를 반복한 흔적. 인기 보드일수록 손을 많이 탔습니다

그래서 보드는 사진과 설명만 보고 사면 위험한 물건입니다. 확인할 것은 이렇습니다.

🔹 기판 양면 사진을 요청합니다. 한쪽만 찍은 매물은 대개 반대쪽에 이유가 있습니다

🔹 부품 주변에 번진 자국이 있는지 봅니다. 사진으로도 대체로 보입니다

🔹 실제 본체에 꽂아 소리가 나는 걸 확인한 매물인지 묻습니다. "미확인" "부품용"이라고 적힌 건 그 말 그대로입니다

🔹 단자가 고르게 반짝이는지 봅니다. 한 줄이 유독 흐리면 접점 문제입니다

값만 보면 8MB짜리 카드가 20만 원대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8MB는 그보다 드뭅니다. 새로 만들어지지 않는 물건이라, 고장난 개체가 빠져나간 만큼 전체 수가 줄어듭니다. 남은 쪽의 값이 그걸 반영하는 겁니다.

한 가지 더. 보드를 살렸는데 본체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JV-2080·XV 세대는 본체 쪽 전해 커패시터 누액이 보고되는 기종입니다. 보드 상태만 챙기고 본체를 안 보면 같은 함정에 반대쪽으로 빠집니다.

SR-JV80 보드 실물. 이 한 장이 8MB입니다

SR-JV80 보드 실물. 이 한 장이 8MB입니다 / 출처: Gustavo.paiva /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⑨ 가장 안 다듬어진 기계가 제일 예뻐진 이유 ✨

JV-1080은 이 계보에서 가장 정교하지 않은 축입니다.

JD-990에 있던 링모듈레이션도 오실레이터 싱크도 FXM도 없습니다. 필터는 12dB 한 종류뿐이고, JV-2080에서 늘어난 필터 4종도 없어요. XV 세대의 스테레오 파형도 32파트도 없습니다. 위아래로 다 밀립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찾는 게 하필 그 기계입니다.

이유는 결국 그 덜 다듬어진 상태가 90년대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2dB 필터를 거친 뻣뻣한 PCM 재생음, 네 톤을 겹쳐 만든 두꺼운데 어딘가 납작한 패드, 공장에서 나온 그대로 쓴 티가 나는 프리셋. 당시에는 "그냥 기본값"이었던 것이 지금은 시대의 인장이 됐습니다.

테임 임팔라가 이 기계의 사용자 명단에 있는 게 우연이 아니에요. 90년대에 자라며 들은 소리를 다시 꺼내는 데 이 기계보다 빠른 길이 없습니다.

▶ Tame Impala - The Less I Know The Better — 90년대의 질감을 지금 쪽으로 끌어온 소리

세련되게 만들려고 애쓴 기계는 그 시대를 초월하려고 했고, 그래서 시대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평범하게 잘 팔린 기계가 그 시대의 표본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앞에서 XV-3080 안에 JD-990의 파형이 들어 있다고 적었습니다. 3년 만에 사라진 기계였지만, 그 소리는 이긴 쪽의 후속 기종에 실려서 계속 팔렸습니다.

기계는 졌고 소리는 남았어요. 이 시리즈 이야기에서 제일 정확한 문장이 그겁니다.

자주 나오는 질문

Q. JD-990과 JV-1080 중 하나를 산다면?

A. 용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완성된 소리를 빨리 꺼내 쓰고 싶으면 1080, 소리를 깎아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으면 990입니다. 990은 PCM을 재료로 쓰는 신디사이저에 가까워서, 프리셋만 훑고 넘어가면 값을 못 뽑습니다. 반대로 1080을 사서 심층 편집을 하려 들면 금방 한계가 옵니다.

Q. 보드는 어디까지 사야 하나요?

A. 본체를 산 이유에 달렸습니다. 특정 시대의 소리가 목적이면 04 Vintage Synth와 02 Orchestral 두 장이면 대부분 해결됩니다. Experience 계열(97·98·99)은 여러 보드에서 뽑아 모은 모음집이라, 뭐가 필요한지 아직 모를 때 한 장으로 넓게 보기 좋습니다. 반대로 장르 전용 보드는 그 장르를 실제로 할 때만 값을 합니다.

Q. 실기 없이 이 소리를 낼 수는 없나요?

A. 이 시대 롬플러 소리는 샘플 팩이나 라이브러리로 상당 부분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기에 있는 건 소리 자체보다 4톤을 쌓고 톤마다 필터를 다르게 거는 그 구조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그게 필요 없으면 굳이 랙을 살 이유가 적습니다.

Q. 지금 사면 고장 걱정은 없나요?

A. 이 계열은 90년대 중후반 기계라 80년대 아날로그보다는 상태가 나은 편입니다. 다만 백업 배터리, 전해 커패시터, LCD 백라이트는 연식만큼 갔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본체보다 먼저 확인할 게 보드입니다. ⑧에 적은 대로 부품이 녹아내린 보드가 실제로 돌아다니고, 그건 값을 깎아서 살 물건이 아니라 안 사는 물건입니다. 소리가 안 나오는 슬롯이 단순 접촉 불량인 경우도 많지만, 보드 쪽이 이미 끝난 경우도 그만큼 있습니다.

마무리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본체 20만 원, 보드 25만 원.

이상해 보이지만 시장은 정직하게 값을 매긴 겁니다. 사람들이 원한 건 기계가 아니라 그 안에 든 8MB였고, 롤랜드는 30년 전에 이미 그 구조로 팔고 있었어요. 본체는 재생 장치고 상품은 소리라는 것. 지금 우리가 플러그인과 샘플 팩을 사는 방식이 그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남긴 다른 한 줄은 좀 씁쓸합니다. 더 잘 만든 기계가 더 오래 팔리지는 않습니다. 더 잘 맞물리는 기계가 오래 팔립니다. JD-990은 소리로 이겼지만 3년 만에 내려왔고, JV-1080은 슬롯 네 개와 GM 뱅크로 6년을 버티며 한 시대의 기본값이 됐습니다.

다만 시간이 좀 흐르니 순서가 다시 바뀌더군요. 지금 값이 붙은 쪽은 990이고, 사랑받는 쪽은 1080입니다. 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은 셈인데, 기계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더 나은 결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DTM #음악제작 #롤랜드 #JV1080 #JD990 #음원모듈 #확장보드 #기재역사 #홈레코딩 #작곡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8천 달러 건반과 2단 랙 — 이뮬레이터와 아카이 S 시리즈가 싸운 10년

보코더와 토크박스 차이 — 왜 다르게 들릴까

오르간 회사가 거절한 스피커 — 해먼드 오르간과 레슬리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