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다시 처음 자리 — MPC 여섯 대를 거쳐온 기록
시작은 그냥 힙합을 좋아해서였습니다.
좋아하는 음반의 크레딧을 들여다보고 어떤 장비로 만들었나 찾아보다 보면 결국 MPC라는 이름이 계속 걸립니다. 그 시절 힙합의 골격을 만든 게 대부분 이 네모난 상자였으니까요.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이 여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사실 순서랄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 책상에는 MPC Live 2가 있고, 그 옆에 크롬으로 커스텀한 MPC1000이 놓여 있습니다. 그 사이에 3000이 있고, 한때는 60도 2000도 있었습니다.
순서대로 적어보면 3000이 먼저였고, 데모 요청이 들어와 1000과 2500을 잠깐 만졌고, 그러고 나서 60을 샀고, 2000을 거쳐, Live 2로 왔다가, 마지막에 1000을 샀습니다. 처음에 남의 물건으로 잠깐 만져봤던 기계를 몇 년 뒤에 제 돈으로 사게 된 셈인데, 그 사이에 뭘 배운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① 시작은 3000이었습니다 🎛️
지금 갖고 있는 MPC3000. 우드 사이드는 나중에 붙인 겁니다.
처음 MPC를 들일 때 60과 3000을 놓고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때는 둘의 중고 가격이 거의 비슷했어요. 값이 같으니 순수하게 어느 쪽을 쓸 거냐만 놓고 재면 됐고, 60은 이름값이 있었고 3000은 실용적이었는데, 결국 3000을 골랐습니다.
지금도 이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여섯 대 중에 하나만 남기라고 하면 고민 없이 3000이니까요.
막상 앉아보고 제일 좋았던 건 소리보다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그걸 하는 버튼이 대개 표면에 나와 있어요. 패드를 치면 그게 그대로 들어가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고 다시 칩니다. 화면을 들여다보며 뭘 고르는 시간보다 손을 움직이는 시간이 훨씬 길어요. 머릿속에 떠오른 것과 실제로 소리가 나오는 사이가 짧다는 것, 그게 MPC를 계속 쓰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좋은 소리가 나서라기보다 생각이 안 식어서요.
여기에 3000만의 몫을 더하자면 대부분 필터에 있습니다. 3000은 32보이스 각각에 12dB/옥타브 레조넌스 로우패스가 붙어 있고, 필터를 위한 엔벨로프가 따로 하나 더 있어서 어택과 디케이를 필터에 걸 수 있습니다. 그리고 Vel>Freq라는 값이 있어요. 벨로시티가 컷오프를 얼마나 여느냐를 0에서 100까지 정하는 항목입니다.
말로 쓰면 사소해 보이는데, 이 하나 때문에 키트가 사실상 늘어납니다. 스네어 하나에 이 값을 걸어두면 세게 친 것과 살살 친 것이 음량만 다른 게 아니라 소리 자체가 달라지니까, 굳이 샘플을 여러 개 얹어서 레이어를 짤 이유가 없어지거든요. 적은 재료로 멀리 가게 만드는 구조인데, 이게 쓰면 쓸수록 크게 느껴집니다.
3000이 정말 좋았던 건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부분입니다. 리듬을 찍어놓고 들어봤는데 뭔가 마음에 안 들 때가 있잖아요. 그게 소스가 별로라서가 아니라 그루브가 안 붙어서인 경우요. 이럴 때 3000에서는 어택을 조금 당기거나 릴리즈를 줄이는 걸 메뉴 한두 번에 끝냅니다. 생각이 떠오르고 손이 가고 소리가 바뀌는 데까지가 거의 끊기지 않아요.
여기에 타이밍 시프트로 특정 소리만 앞뒤로 밀거나 퀀타이즈 값을 바꿔가며 잡아보는 것까지 붙습니다. 그루브를 계산해서 설계하는 게 아니라 만지면서 찾아가게 되는데, 이게 되니까 안 되던 비트가 되는 순간이 자주 나왔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기계는 흑인음악을 하려고 태어난 물건이구나. 스펙을 뽐내려고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이 손으로 만드는 리듬을 어떻게든 살리는 쪽으로 설계가 되어 있으니까요.
요즘은 3000으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안 치우고 있습니다. 샘플을 여기 한 번 통과시켜서 쓰는 일이 있어서요. 소리를 만들러 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소리를 이쪽 색으로 바꾸러 켜는 셈입니다.
참고로 3000에는 Vailixi라는 서드파티 OS가 있습니다. 버전 3.50이고 EPROM 두 개만 갈아끼우면 되니 납땜은 필요 없어요. 오래 남아 있던 버그가 정리되고 메모리 상태를 보는 화면이나 샘플 트림 기능이 붙는데, 이걸 올려두면 30년 전 기계인데도 지금 앉아서 답답하지 않을 정도까지 옵니다.
② 남의 물건으로 만져본 1000과 2500 📦
3000을 한창 쓰던 시절에 데모 요청이 들어와서 1000과 2500을 잠깐 만질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물건이 아니었으니 오래 붙어 있지는 못했고, 그래서 기억도 흐릿합니다.
특히 2500은 인상이 거의 안 남았어요. 제가 만졌을 때는 JJOS가 나오기 전이라, 지금 사람들이 얘기하는 2500과는 사실상 다른 물건이었을 겁니다. 다만 소리만은 기억에 있는데, 플라스틱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3000 쪽에서 나던 두께가 없었어요.
1000은 이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사야겠다는 데까지는 안 갔습니다. 그게 나중에 뒤집힐 줄은 몰랐고요.
③ 그러다 60을 샀습니다 ⚠️
MPC60 디스플레이 부분. 이 화면 하나로 다 했습니다.
3000을 잘 쓰고 있었는데도 처음에 안 고른 쪽이 계속 걸렸습니다. 12비트 샘플러고 힙합에서 많이 쓰였다더라, 그 말이 머릿속에서 안 지워지더군요. 결국 몇 년 뒤에 60을 샀습니다. SP-1200을 살 때와 똑같은 동기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켜놓고 앉으니 제일 먼저 막힌 게 소리가 아니라 로딩 시간이었습니다.
저장이 720KB 플로피다 보니 샘플 하나 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드는 흐름을 그냥 끊어버립니다. 하나 불러서 들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른 걸 불러오는, 그 당연한 왕복이 성립을 안 해요. 뭘 해보기도 전에 기다리는 시간이 먼저 오니까 생각이 식어버립니다.
느린 건 그래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산 거였습니다. 정작 예상 밖이었던 건 소리 쪽이었어요.
당시 저는 이미 아카이 S612를 갖고 있었습니다. 1985년에 나온 12비트 랙 샘플러인데, 12비트라는 조건이 같다 보니 제가 60에서 기대하던 질감이 S612에서 이미 나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60 앞에 앉아 있어도 이게 S612보다 뭐가 나은 건지가 계속 걸렸고, 그 답이 끝내 안 나왔습니다.
게다가 60에는 필터가 없습니다. 컷오프도 레조넌스도 없고, LFO도 없고, 엔벨로프는 어택과 디케이 두 개짜리 하나가 전부예요. 12비트 40kHz로 모노 녹음이고 샘플 메모리는 768KB, 시간으로 치면 13.1초, 확장해도 26.2초입니다. 소리를 넣고 나면 그 안에서 만질 수 있는 게 사실상 없다는 뜻입니다. 3000에서 당연하게 쓰던 것들이 여기엔 아예 없었으니, 순서를 3000 다음에 60으로 밟은 게 제 쪽에는 불리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12비트 질감은 이미 다른 데서 나오고 있었고, 다듬는 건 안 되고, 부르는 건 느리고. 이 셋이 겹치니 자연히 손이 안 가더군요. 결국 60은 실전에서 거의 못 썼습니다.
④ 팔았고, 값이 세 배가 됐습니다 💰
그래서 팔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시세를 보면 제가 샀을 때보다 세 배 넘게 올라 있습니다. 살 때는 그렇게 비싼 물건이 아니었거든요.
처음에 60과 3000을 저울질하던 시절에는 둘 값이 거의 같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그때는 같은 선에 놓고 고르던 두 대인데, 지금은 한쪽이 저만치 올라가 있으니까요. 소리나 기능이 그 사이에 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죠.
요즘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쓰지도 않을 거였으면서, 그냥 갖고나 있을걸 그랬나.
솔직히 이건 음악하는 사람의 후회가 아니라 물건 가진 사람의 후회입니다. 그 소리가 그리워서 다시 사고 싶은 게 아니라 안 팔았으면 지금 얼마인데 싶은 거니까요. 그걸 「그 소리가 그립다」로 포장하면 거짓말이 되겠죠.
다만 빈티지 값이 다 오르는 건 아닙니다. MPC5000처럼 발매가에서 크게 내려앉은 기종도 있으니까요. 이름값과 실제 수요는 생각보다 다르게 움직입니다. 참고로 제가 말한 세 배는 판 값과 지금 올라와 있는 매물을 견줘본 개인적인 체감이고, 실제 거래가는 상태와 개조 여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큽니다. 장비를 그런 기준으로 사시는 건 권하지 않습니다.
⑤ 2000에서 들은 소리 🔊
60 다음이 2000이었습니다.
그때 쓰던 MPC2000.
여기서는 좀 다른 걸 배웠어요. 808 킥 키트를 이 기계에 통과시켰을 때, 제가 가진 것 중에 요즘 나오는 외국 힙합 소리에 가장 가까운 게 나왔습니다. 3000이나 60을 거쳤을 때와는 방향 자체가 달랐습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요즘 트랩 하는 사람들이 이걸로 작업하고 있구나.
편의성도 앞의 두 대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16비트 44.1kHz에 램은 32MB까지 올라가고 시퀀서는 64트랙인 데다, 화면도 크고 저장도 훨씬 낫습니다.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라 지금도 매물이 흔하고요.
대신 고장 나는 자리가 알려져 있습니다. 화면이 어두워지는 것, 패드 센서가 죽는 것, 8아웃 확장을 잘못 달아서 전원부가 나가는 것. 중고로 보실 거라면 이 세 가지는 물어보고 사시는 편이 좋습니다.
⑥ 무대에 올릴 물건이 필요했습니다 🎤
Live 2로 넘어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공연이었어요.
빈티지 기종들은 무대에 올리기에 제한이 너무 많습니다. 무겁고, 저장 매체가 못 미덥고, 전원 사정에 예민한 데다, 문제가 생겨도 그 자리에서 손쓸 방법이 없어요. 스튜디오에서 소리가 좋다는 것과 무대에서 믿을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Live 2는 배터리가 들어 있고 저장이 안전하고 안에서 끝까지 가니까, 그 부분이 한 번에 해결됩니다.
그런데 편해진 만큼 빈티지에서 되던 게 오히려 번거로워진 부분도 있습니다.
2000이나 3000은 패드 프로그램과 시퀀스가 따로 놉니다. 키트를 하나 골라 얹어두면 그 상태가 기계에 남아 있고 시퀀스는 시퀀스대로 갈아끼우면 되니까, 소리를 정해놓고 패턴만 계속 바꿔보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나오죠.
Live 2는 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아카이가 직접 그려놓은 계층도를 보면 송, 시퀀스, 트랙, 프로그램 순서인데, 프로그램이 제일 아래에 있고 트랙이 그걸 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트랙은 시퀀스에 속하고요. 예전엔 키트가 기계의 상태였다면 지금은 트랙의 속성이 된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자리에서 같은 키트로 쳐보려면 트랙을 다시 손봐야 하고, 시퀀스를 늘릴 때마다 그 확인이 따라붙습니다. 기능이 늘어난 대신 계층이 하나 더 생긴 건데, 만드는 입장에서는 이게 꽤 걸리더군요.
메뉴다이빙도 오히려 늘었습니다. 3000에서 벨로시티 필터를 걸거나 드럼의 어택과 릴리즈를 만지는 건 몇 번 안에 끝나요. 화면이 작고 기능이 적으니까 원하는 게 대개 표면 가까이에 나와 있거든요. 반면 Live 2는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고 그만큼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한 번은 몇 초짜리지만 그게 반복되면 만들던 게 끊깁니다. 화면은 커졌는데 손은 더 바빠진 셈이에요.
물론 최근 쪽이 확실히 나은 것도 있습니다. 샘플 차핑은 비교 자체가 안 돼요. 빈티지에서는 조그셔틀을 하루 종일 돌려야 하는 일인데 지금은 파형을 보면서 잘라내면 되니까요. 이건 그냥 신형이 낫습니다.
⑦ 결국 1000을 샀습니다 ✅
그리고 마지막에 1000을 샀습니다. 크롬으로 커스텀한 개체예요. 예전에 데모 요청으로 잠깐 만져보고 굳이 살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그 기계를, 몇 년 뒤에 제 돈 주고 산 겁니다.
이유는 그때 안 보이던 게 나중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고 귀엽거든요. 책상에 올려두는 부담이 없고 들고 나갈 수도 있고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그 정도인데, 장비를 오래 만지다 보면 이런 게 의외로 오래 갑니다.
단점은 여전합니다. 커맨드가 패드에 심어져 있어서 뭘 하려면 패드를 누르면서 다른 걸 눌러야 하는데, 이게 계속 걸려요. 패드는 치는 물건인데 그 위에 기능까지 얹어놓으니 두 가지 용도가 섞여버립니다. 작은 몸통에 다 넣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 건 알겠는데, 알겠다고 안 짜증나는 건 아니더군요.
여기까지 적고 보니 이 여섯 대의 순서에 뚜렷한 방향이 없습니다. 좋은 걸 찾아 위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옛날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도 아니에요. 이름값을 좇아 60으로 갔다가 실망했고, 필요해서 Live 2로 갔다가 불편한 걸 찾아냈고, 안 사도 된다고 생각했던 1000을 결국 샀습니다.
UI는 나아졌는데 UX는 안 나아진 부분이 있고, 그 반대인 부분도 있습니다. 앞선 세대의 것을 다 담은 위에 새로 얹은 게 아니라 어떤 건 넘어왔고 어떤 건 안 넘어왔다는 쪽에 가까워요. 3000에 Vailixi를 올려두고 앉아 있으면 지금도 꽤 편한 감각으로 작업이 되는데, 그런 걸 보고 있으면 구형이라 불편하다는 말이 늘 맞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⑧ Q&A 💬
Q. MPC60을 사려는데 어떨까요?
A. 12비트 질감이 목적이라면 굳이 60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미 갖고 있던 아카이 S612와 비교해서 메리트를 못 느꼈어요. 필터도 LFO도 없어서 소리를 넣은 뒤에 만질 수 있는 게 거의 없고, 플로피라 부르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 이름과 생김새를 갖고 싶으신 거라면 얘기가 다릅니다만, 그건 그렇다고 인정하고 사시는 편이 낫습니다.
Q. 빈티지 MPC 중에 하나만 고른다면요?
A. 3000입니다. 보이스마다 레조넌스 필터가 붙어 있고 벨로시티로 컷오프를 열 수 있어서 적은 키트로 갈 수 있는 폭이 훨씬 넓거든요. 60에는 그게 없습니다. Vailixi OS까지 올리면 지금 써도 답답하지 않습니다.
Q. 2000은 지금 사도 되나요?
A. 매물이 많아 고르기는 좋습니다. 다만 화면 어두워짐, 패드 센서, 8아웃 확장 관련 전원부 문제는 확인하고 사세요. 808 계열을 통과시키는 용도로는 제가 가진 것 중에 제일 잘 맞았습니다.
Q. 빈티지를 쓰면 소리가 좋아지나요?
A. 좋아진다기보다 달라집니다. 저도 60에서 기대했던 소리를 결국 못 얻었어요. 이미 갖고 계신 장비로 그 질감이 나오고 있다면 굳이 늘리실 이유는 없습니다.
Q. 그래서 60을 다시 살 건가요?
A. 아마 안 살 것 같습니다. 안 팔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지금 돈 주고 다시 사는 건 다른 얘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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