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기계 뭐지? — 영화·드라마에 나온 음악 장비 20가지

1986년 영화 한 장면. 고등학생이 침대에 누워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힘이 하나도 없고, 중간중간 기침에 재채기까지 섞여요. 누가 들어도 아픈 애입니다.

그런데 그 기침과 재채기, 전부 침대 옆 건반을 눌러서 내는 소리입니다.

음악 하는 사람은 영화를 보다가 이런 데서 멈칫합니다. 줄거리보다 저 기계 뭐지?가 먼저 궁금해지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영화와 드라마에 나온 음악 장비를 최대한 많이 모아봤습니다. 신디사이저, 녹음기, 기타와 앰프, 들고 다니는 재생기까지요. 장면마다 그 장비가 실제로 어떤 물건이었는지, 왜 하필 그게 나왔는지 같이 적었습니다.

① 신디사이저와 샘플러 🎹

🔹 『페리스의 해방』(1986) — E-mu 에뮬레이터 II

앞에서 말한 그 장면입니다. 페리스가 꾀병을 부릴 때 쓴 건반이 E-mu 에뮬레이터 II예요. 기침과 재채기를 샘플로 담아두고 건반으로 틀어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준 거죠.

에뮬레이터 II는 1984년에 나온 샘플러입니다. 샘플러는 소리를 녹음해 뒀다가 건반을 누르면 그 소리를 음 높이에 맞춰 재생하는 악기예요. 가격은 기본형이 7,995달러, 메모리를 늘린 플러스 모델이 9,995달러였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 비싼데, 그래도 당시엔 싼 편이었어요. 경쟁 기종인 페어라이트 CMI 시리즈 II는 가장 싼 모델이 3만 달러였거든요.

고등학생 방에 이런 기계가 있다는 것 자체가 페리스가 어떤 애인지 말해줍니다. 부모가 원하는 건 다 사주는 집, 그리고 그걸 장난에 쓸 만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아이요.

▶ Ferris Bueller's Day Off 공식 예고편 — 페리스의 방과 그 특유의 능청이 그대로 나옵니다

E-mu 에뮬레이터 II+. 메모리를 늘린 「플러스」 모델입니다

E-mu 에뮬레이터 II+. 메모리를 늘린 「플러스」 모델입니다 / 출처: Mojosynths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미지와의 조우』(1977) — ARP 2500

외계 모선과 인간이 다섯 음으로 대화하는 장면, 기억하실 거예요. 그 다섯 음을 연주하는 거대한 기계가 ARP 2500입니다.

ARP 2500은 ARP 인스트루먼츠가 처음 만든 제품으로,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생산된 모듈러 신디사이저예요. 모듈러는 발진기·필터·앰프 같은 부품을 따로따로 연결해서 소리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풀 시스템을 갖추면 최대 2만 달러까지 들었는데, 당시 미국 평균 집값의 절반 가까운 돈이었어요. 그래서 팔린 건 100대 정도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연주자입니다. ARP의 엔지니어링 부사장 필립 도즈가 장비를 설치하러 촬영장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기계를 연주하는 역할로 캐스팅됐어요. 영화 속에서 다섯 음을 치는 사람이 실제 그 기계를 만든 회사 사람인 겁니다.

▶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공식 예고편 — 그 다섯 음이 예고편에도 나옵니다

『미지와의 조우』에 나온 것과 같은 ARP 2500

『미지와의 조우』에 나온 것과 같은 ARP 2500 / 출처: guiltysin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세서미 스트리트』(1983) — 페어라이트 CMI

드라마는 아니지만 TV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1983년, 허비 행콕이 『세서미 스트리트』에 나와 아이들에게 페어라이트 CMI를 보여줍니다.

행콕은 어린 여자아이한테 마이크에 이름을 말해보라고 하고, 그 목소리를 건반으로 높게도 낮게도 재생합니다. 아이들이 건반을 하나씩 눌러보고, 행콕은 모니터에 음악이 어떻게 보이는지도 설명해요. 이때 이름을 말한 아이가 나중에 『더 프레시 프린스 오브 벨에어』의 애슐리 역으로 유명해진 타티아나 알리입니다.

페어라이트 CMI는 호주에서 만든 샘플러 겸 음악 컴퓨터예요. 1980년 미국에서 행콕과 스티비 원더가 각각 2만 7,500달러에 샀습니다. 그 비싼 기계를 들고 어린이 방송에 나왔던 겁니다.

▶ Herbie Hancock - Sesame Street — 아이 목소리를 샘플로 떠서 건반으로 연주하는 장면

페어라이트 CMI 시리즈 IIx. 라이트펜으로 화면을 찍어서 조작했습니다

페어라이트 CMI 시리즈 IIx. 라이트펜으로 화면을 찍어서 조작했습니다 / 출처: Peter Wielk /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 『스톱 메이킹 센스』(1984) — 롤랜드 TR-808

토킹 헤즈의 공연 영화입니다. 첫 장면에서 데이비드 번이 텅 빈 무대에 어쿠스틱 기타와 붐박스 하나를 들고 나옵니다. 테이프를 틀겠다며 붐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탁탁 하는 비트가 흐르고, 그 위에 「Psycho Killer」를 부르죠.

그런데 그 붐박스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났습니다. 실제 비트는 카메라에 안 잡히는 믹싱 콘솔 쪽에서 롤랜드 TR-808로 튼 소리였어요. 808은 1980년에 1,195달러로 나와 1983년까지 약 1만 2천 대가 만들어진 드럼머신입니다. 힙합과 댄스 음악의 저음 킥으로 유명한 그 기계가, 여기서는 혼자 노래하는 남자의 박자를 잡아줬어요.

🛒 Roland TR-8S (TR-808 소리를 담은 현행 리듬 머신) — 롤랜드 공식

▶ Stop Making Sense - Official Trailer — 4K 리마스터 재개봉 예고편

▶ Talking Heads - Psycho Killer — 영화 첫 곡. 어쿠스틱 기타와 808만으로 시작합니다

롤랜드 TR-808

롤랜드 TR-808 / 출처: fr4dd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라라랜드』(2016) — 키타

재즈만 고집하던 세바스찬이 수영장 파티에서 80년대 히트곡 커버 밴드를 하고 있습니다. 새빨간 무대 의상을 입고 목에 건반을 메고요. 그걸 본 미아가 일부러 「I Ran」을 신청해서 놀리는 장면입니다.

목에 메는 건반을 키타(keytar)라고 합니다. 키보드와 기타를 합친 말이에요. 무대에서 돌아다니며 칠 수 있어서 80년대에 크게 유행했습니다. 영화 속 키타는 1987년에 나온 야마하 SHS-10으로 알려져 있어요. 미니 건반 32개짜리 작은 모델입니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80년대 장난감 같은 키타를 메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세바스찬의 처지를 보여주는 소품이에요.

▶ A Flock of Seagulls - I Ran — 미아가 신청한 그 곡

야마하 SHS-10

야마하 SHS-10 / 출처: Methoxodus /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② 녹음기와 턴테이블 🎙️

🔹 『필사의 추적』(1981) — 나그라 녹음기

원제는 『블로우 아웃(Blow Out)』입니다. 존 트라볼타가 B급 영화의 효과음 녹음기사 잭으로 나와요. 밤에 공원에서 바람 소리를 녹음하다가 자동차 사고를 녹음하게 되는데, 테이프를 다시 들어보니 타이어가 터지기 직전에 총소리가 있습니다.

잭이 들고 다니는 녹음기가 나그라예요. 영화에는 III와 SN 두 기종이 나옵니다. 나그라는 1951년 스위스에서 나온 휴대용 릴 테이프 녹음기 브랜드입니다. 폴란드 출신 스테판 쿠델스키가 설계했고, 이름은 폴란드어로 「녹음할 것이다」라는 뜻이에요. 1958년에 나온 나그라 III가 영화 현장에서 쓸 수 있는 첫 모델이었고,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영화 동시녹음의 표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녹음하는 장면이 나오면 대개 나그라가 등장합니다. 비틀스의 『헬프!』(1965)에서는 들판에서 「I Need You」를 녹음하는 장면에 나그라 III가, 코폴라의 『컨버세이션』(1974)에서는 도청 전문가의 손에 나그라 SN이 들려 있어요.

▶ Blow Out 예고편 —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공식 채널

음악 쪽 일화도 하나 있습니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Cecilia」 리듬 트랙은 기타 케이스, 피아노 의자, 무릎을 두드린 소리를 녹음해서 만든 겁니다. 폴 사이먼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쓴 녹음기가 나그라였고, 그 녹음기가 의도치 않게 만든 슬랩백 울림이 곡의 소리가 됐다고 해요.

▶ Simon & Garfunkel - Cecilia — 처음부터 들리는 그 손뼉·두드림 리듬

나그라 III(1958). 영화 동시녹음 현장을 수십 년 동안 지킨 휴대용 릴 녹음기입니다

나그라 III(1958). 영화 동시녹음 현장을 수십 년 동안 지킨 휴대용 릴 녹음기입니다 / 출처: tomislav medak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더 겟 다운』(2016) — 테크닉스 턴테이블과 크레용

넷플릭스 드라마로, 70년대 후반 뉴욕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힙합이 태어나는 과정을 그립니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도 등장인물로 나오고, 실제 플래시는 제작에 참여했어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유명한 소품은 턴테이블이 아니라 보라색 크레용입니다. 플래시가 주인공들에게 크레용을 건네는데, 레코드판의 특정 지점에 표시를 해두는 용도예요. 턴테이블 두 대에 같은 판을 걸어 놓고, 표시한 지점까지 판을 손으로 되돌려가며 브레이크 구간을 끝없이 이어 붙이는 기술, 플래시가 「퀵 믹스 이론」이라고 부른 방법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플래시 역을 맡은 배우 마무두 아티는 촬영 전에 진짜 플래시와 몇 달 동안 한집에 살면서 디제잉을 배웠다고 합니다.

턴테이블은 테크닉스입니다. 1972년에 처음 나온 SL-1200 시리즈는 모터가 판을 직접 돌리는 다이렉트 드라이브 방식입니다. 회전 속도가 정확해서 두 대의 박자를 맞추기 좋았어요. 1979년에 나온 SL-1200MK2부터는 아예 DJ 턴테이블의 대명사가 됐고, 플래시가 쓰던 테크닉스 턴테이블은 지금 스미스소니언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 Technics SL-1200 시리즈 — 테크닉스 공식 (국내 정식 취급처는 별도 확인)

▶ The Get Down - Official Trailer — 70년대 브롱크스의 턴테이블과 크레용

테크닉스 SL-1200MK2

테크닉스 SL-1200MK2 / 출처: Adrian DuMay from USA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③ 기타와 앰프 🎸

🔹 『백 투 더 퓨처』(1985) — 거대한 앰프와 치키타 기타

영화가 시작하면 마티가 브라운 박사의 실험실에 몰래 들어옵니다. 사람 키보다 큰 앰프에 기타를 꽂고, 볼륨을 끝까지 올리고, 줄을 한 번 긁습니다. 그 한 방에 마티는 뒤로 나가떨어집니다.

그 앰프는 영화를 위해 만든 소품이고, 마티가 꽂은 기타는 진짜입니다. 얼와인 치키타(Chiquita)라는 트래블 기타예요. 몸통이 아주 작은 여행용 기타로, 마크 얼와인이 ZZ 탑의 빌리 기번스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작은 기타와 거대한 앰프를 붙여 놓은 그림 자체가 농담이에요.

🔹 『백 투 더 퓨처』(1985) — 깁슨 ES-345

같은 영화의 클라이맥스. 1955년 학교 댄스파티에서 마티가 척 베리의 「Johnny B. Goode」를 연주합니다. 이때 든 빨간 기타가 깁슨 ES-345예요.

문제는 ES-345가 1958년에 나온 기타라는 점입니다. 1955년 무대에 3년 뒤에야 나올 기타가 올라간 거죠. 소품팀이 원래 시대에 맞는 ES-5를 골라 뒀는데, 촬영 당일에 빨간색에 비브라토 암이 달린 기타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와서 급하게 ES-345로 바꿨다고 합니다. 척 베리를 떠올리게 하는 빨간 기타가 더 중요했던 거예요. 마이클 J. 폭스는 나중에 이 일을 두고 큰 차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이 장면에서 폭스의 노래는 마크 캠벨이라는 가수가 대신 불렀습니다. 기타 연주 동작은 따로 레슨을 받아 익혔고요.

▶ Back to the Future — Marty McFly Plays "Johnny B. Goode"

1960년식 깁슨 ES-345. 영화 속 기타와 같은 체리 레드 계열입니다

1960년식 깁슨 ES-345. 영화 속 기타와 같은 체리 레드 계열입니다 / 출처: Lightburst /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1984) — 11까지 있는 마셜 앰프

가상의 헤비메탈 밴드를 다큐멘터리처럼 찍은 코미디입니다. 기타리스트 나이젤이 자기 마셜 앰프를 자랑하는데, 볼륨 노브 눈금이 10이 아니라 11까지 있어요. 「다른 앰프는 10이 끝이지만 이건 하나 더 올라간다」는 거죠. 그럼 10을 더 크게 만들면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나이젤은 한참 생각하다가 「이건 11까지 올라간다」고만 반복합니다.

이 장면에서 나온 「up to eleven」은 영어권에서 「한계를 넘어 끝까지」라는 관용구가 됐습니다.

▶ This Is Spinal Tap - 41st Anniversary Official Trailer

마셜 앰프 스택. 헤드 아래에 4×12 캐비닛을 쌓은 그 모양입니다

마셜 앰프 스택. 헤드 아래에 4×12 캐비닛을 쌓은 그 모양입니다 / 출처: Jim J /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웨인즈 월드』(1992) — 64년식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웨인이 악기점 진열장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엑스칼리버」라고 부르는 기타는 1964년식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올림픽 화이트예요. 웨인은 이걸 「CBS 인수 전 펜더」라고 강조합니다.

이 대사는 기타 하는 사람만 웃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펜더는 1965년 초에 방송사 CBS에 팔렸고, 기타 애호가들 사이에선 그 전에 만든 기타를 프리 CBS라고 부르며 훨씬 높게 쳐줍니다. 64년식은 프리 CBS의 마지막 해에 가까운 모델이에요. 영화가 히트한 뒤 펜더와 스콰이어는 이 기타를 본뜬 「웨인즈 월드」 모델까지 냈습니다.

▶ Wayne's World 예고편 — Paramount 공식 채널

올림픽 화이트 스트라토캐스터(70년대 스타일 복각 모델). 영화 속 엑스칼리버와 같은 색입니다

올림픽 화이트 스트라토캐스터(70년대 스타일 복각 모델). 영화 속 엑스칼리버와 같은 색입니다 / 출처: Freebird from Madrid, Spain /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④ 들고 다니는 음악 📼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 — 소니 워크맨 TPS-L2

우주 한복판에서 주인공 피터 퀼이 헤드폰을 쓰고 70년대 노래에 맞춰 춤을 춥니다. 그가 허리에 찬 파란색과 은색 카세트 플레이어가 소니 워크맨 TPS-L2, 1979년 7월 1일에 일본에서 33,000엔에 나온 첫 번째 워크맨이에요.

퀼에게 이 워크맨은 그냥 재생기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남긴 노래 모음 테이프 「Awesome Mix Vol. 1」을 듣는 기계이자, 떠나온 지구와 가족을 이어주는 유일한 물건이에요. 감독 제임스 건도 이 테이프를 퀼이 지구와 이어져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운드트랙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 1위까지 올랐습니다. 이미 발표된 옛날 노래로만 채운 사운드트랙이 1위를 한 건 처음이었어요. 디즈니 쪽 레이블 할리우드 레코드는 이 앨범을 진짜 카세트테이프로도 냈습니다. 디즈니 뮤직 그룹이 2003년 이후 처음 낸 카세트였어요. 2편이 나왔을 때는 이베이에서 TPS-L2 중고 가격이 크게 뛰었다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 Guardians of the Galaxy - Trailer 1 — 첫 장면부터 워크맨이 나옵니다

▶ Blue Swede - Hooked On A Feeling — 예고편에 쓰여 영화보다 먼저 유명해진 그 노래

소니 워크맨 TPS-L2(1979). 퀼이 허리에 찬 바로 그 모델입니다

소니 워크맨 TPS-L2(1979). 퀼이 허리에 찬 바로 그 모델입니다 / 출처: Binarysequence /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 『기묘한 이야기』 시즌 4(2022) — 워크맨과 「Running Up That Hill」

맥스는 시즌 4 내내 헤드폰을 끼고 다닙니다. 소니 워크맨이고, 모델은 WM-8로 알려져 있어요. 그리고 괴물 베크나에게 끌려가던 맥스를 현실로 다시 끌어오는 게 바로 이 워크맨에서 나오는 노래, 케이트 부시의 「Running Up That Hill」입니다.

이 장면 하나로 1985년 노래가 37년 만에 다시 차트에 올라 8개 나라에서 1위를 했습니다. 드라마 안에서는 워크맨이 생명줄이었고, 드라마 밖에서는 옛 노래를 다시 살린 거예요.

▶ Stranger Things 4 - Max's Song — 넷플릭스 공식 채널

▶ Kate Bush - Running Up That Hill — 원곡 뮤직비디오

🔹 『응답하라 1988』(2015) — 택이 방의 워크맨

1988년 쌍문동 골목을 그대로 옮겨 온 드라마죠. 소품팀은 그 시절 가전제품을 골동품 가게와 경매 사이트를 뒤져서 구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택이(박보검) 방에 놓인 워크맨이에요.

그 시절 한국 학생들 손에는 소니 워크맨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삼성이 워크맨을 참고해 만든 휴대용 카세트 마이마이도 많이 들고 다녔어요. 손에 쥐거나 허리에 찰 수 있는 크기라, 큰 카세트 데크만 보던 10대한테는 꽤 새로운 물건이었습니다.

🔹 『건축학개론』(2012) — 휴대용 CD 플레이어

옥상에서 서연(수지)이 승민(이제훈)에게 이어폰 한쪽을 건넵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90년대 학번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장면이죠.

이때 서연이 들고 있던 게 휴대용 CD 플레이어, 흔히 CDP라고 부르던 물건입니다. 소니가 1995년에 낸 디스크맨 D-777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영화에서는 앞면의 로고를 가렸고, 대신 그 시절 유행하던 라벨 메이커로 뽑은 「SEOYEUN」 스티커가 붙어 있습니다. 카세트에서 CD로 넘어가던 시기를 이 기계 하나로 보여주는 거예요.

▶ 건축학개론 메인 예고편 — 제작사 명필름 공식 채널

▶ 전람회 - 기억의 습작 — 이어폰 한쪽으로 흘러나오던 그 노래

🔹 『베이비 드라이버』(2017) — 아이팟 여러 대

주인공 베이비는 어릴 때 사고로 이명이 생겨서 늘 음악을 틉니다. 그런데 그 재생기가 스마트폰이 아니라 아이팟이에요. 그것도 한 대가 아닙니다. 첫 추격 장면에서는 5세대 아이팟 클래식을 쓰고, 집 탁자 위에는 아이팟 미니·셔플·나노, 빨간 휠이 달린 U2 에디션까지 여러 대가 늘어서 있어요.

감독 에드거 라이트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열두 살부터 차를 훔쳐왔다면, 훔친 차에서 챙긴 게 선글라스와 아이팟이었을 거라고요. 베이비는 또 사람들 대화를 몰래 녹음해서 그걸 잘라 붙여 자기만의 믹스테이프를 만듭니다. 이 녹음 때문에 경찰 끄나풀로 오해받는 장면도 나와요.

▶ Baby Driver - Official Trailer — 이어폰을 끼는 순간 음악과 액션이 같이 시작됩니다

5세대 아이팟 클래식(2005). 베이비가 첫 장면에서 쓰는 모델입니다

5세대 아이팟 클래식(2005). 베이비가 첫 장면에서 쓰는 모델입니다 / 출처: Stahlkocher /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 『똑바로 살아라』(1989) — 프로맥스 붐박스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입니다. 라디오 라힘은 동네 어디를 가든 커다란 붐박스로 퍼블릭 에너미의 「Fight the Power」를 틀고 다녀요. 이 붐박스가 프로맥스 슈퍼 점보입니다. 카세트 데크 두 개, 이퀄라이저, 8인치 우퍼 두 개에 미드레인지·트위터까지 한 쌍씩 달린 덩치였어요.

결국 피자 가게 주인이 이 붐박스를 야구방망이로 부수면서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영화에 쓰인 그 붐박스는 지금 스미스소니언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에 소장돼 있어요.

▶ Public Enemy - Fight The Power — 라힘의 붐박스에서 끝없이 나오던 노래

『똑바로 살아라』에 쓰인 라디오 라힘의 붐박스. 퍼블릭 에너미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똑바로 살아라』에 쓰인 라디오 라힘의 붐박스. 퍼블릭 에너미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 출처: 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 / CC0 via Wikimedia Commons

같은 해에 붐박스로 유명해진 영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금지된 사랑(Say Anything...)』(1989)에서 로이드가 다이앤의 창문 아래서 붐박스를 머리 위로 치켜드는 장면이에요. 흘러나오는 곡은 피터 가브리엘의 「In Your Eyes」입니다. 배우 존 쿠색은 처음엔 이 장면이 너무 과하다며 안 찍으려고 했고, 원래 쓰려던 곡도 다른 노래였다고 해요. 붐박스 모델은 확실히 밝혀진 자료가 없어서 여기선 넘어가겠습니다.

▶ Peter Gabriel - In Your Eyes — 로이드의 붐박스에서 나온 그 곡

🔹 『드라이브 마이 카』(2021) — 카세트테이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입니다. 연출가 가후쿠는 빨간 사브 900 터보를 몰면서 늘 카세트테이프를 틉니다. 테이프에는 세상을 떠난 아내 오토가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읽은 목소리가 들어 있어요. 가후쿠가 맡은 바냐의 대사만 비워두고요. 그래서 가후쿠는 운전하면서 빈칸에 자기 대사를 채워 넣습니다.

음악은 아니지만, 카세트라는 매체가 왜 아직도 영화에 나오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파일은 언제든 넘기고 지울 수 있지만, 테이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시간 그대로 흘러가거든요.

▶ Drive My Car - Trailer — 차 안에서 테이프를 듣는 가후쿠

사브 900 터보. 영화 속 차와 같은 빨간색입니다

사브 900 터보. 영화 속 차와 같은 빨간색입니다 / 출처: Renée Kools / CC BY 4.0 via Wikimedia Commons

⑤ 화면엔 안 나왔지만 소리로 출연한 장비 🔊

장비가 화면에는 한 번도 안 나오는데, 사운드트랙만 들어도 그 기계가 떠오르는 작품도 있습니다. 두 작품만 짧게 짚겠습니다.

🔹 『블레이드 러너』(1982) — 야마하 CS-80

반젤리스가 이 영화 음악의 중심에 둔 신디사이저가 야마하 CS-80입니다. 비 내리는 미래 도시의 그 묵직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이 기계에서 나왔어요.

▶ Vangelis - Blade Runner — CS-80 특유의 굵은 브라스 소리

야마하 CS-80(1977)

야마하 CS-80(1977) / 출처: Csaba Zvekan. Original uploader was Csabi911 at en.wikipedia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 『기묘한 이야기』(2016~) 오프닝 — 신디사이저 25대

오프닝 테마는 밴드 S U R V I V E의 카일 딕슨과 마이클 스타인이 만들었습니다. 사운드 온 사운드 인터뷰에 따르면 이 짧은 곡에 신디사이저가 25대 정도 들어갔어요.

🔹 메인 아르페지오 — 오리지널 오버하임 SEM 투 보이스

🔹 베이스 라인 — 롤랜드 SH-2

🔹 심장 박동 같은 쿵쿵 소리 — 시퀀셜 프로원

🔹 합창 같은 짧은 소리 — 멜로트론 M400

🔹 패드와 효과 — 시퀀셜 프로펫-5·6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깔아둔 프로펫-5 피아노 파트가 있는데, 그걸 빼면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같은 파트를 여러 대로 겹쳐서 깊이를 만든 거예요.

▶ Kyle Dixon & Michael Stein - Stranger Things — 오프닝 테마 원곡

톰 오버하임과 오버하임 SEM, 투 보이스 프로(복각판)

톰 오버하임과 오버하임 SEM, 투 보이스 프로(복각판) / 출처: Pete Brown from Gambrills, MD, USA /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자주 나오는 질문

Q. 영화에 나온 장비는 진짜 그 기계인가요, 소품인가요?

A. 둘 다 있습니다. 『미지와의 조우』의 ARP 2500이나 『필사의 추적』의 나그라처럼 진짜 기계를 그대로 쓴 경우가 많아요. 반면 『백 투 더 퓨처』 첫 장면의 거대한 앰프는 영화용으로 만든 소품입니다. 『스톱 메이킹 센스』의 붐박스처럼 진짜 기계인데 소리는 안 나는 경우도 있고요.

Q. 영화가 장비 중고 시세에 영향을 주나요?

A. 줍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가 나왔을 때 이베이에서 워크맨 TPS-L2 가격이 크게 뛰었다는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렸습니다. 『웨인즈 월드』는 아예 펜더가 기념 모델을 냈고요. 다만 장면이 화제가 됐을 때 사는 건 가장 비쌀 때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Q. 고증이 틀린 경우도 많나요?

A. 꽤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백 투 더 퓨처』의 ES-345예요. 1955년 장면에 1958년 기타가 나왔죠. 그런데 그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 대부분은 연도보다 빨간 기타와 척 베리를 기억합니다. 영화에서는 정확한 연도보다 관객이 한눈에 알아보는 상징이 더 중요할 때가 많아요.

Q. 지금 이 장비들을 소리로 써볼 수 있나요?

A. 대부분 소프트웨어로 나와 있습니다. 페어라이트 CMI, TR-808, CS-80, 오버하임 SEM은 모두 플러그인 복각판이 나와 있어요. 워크맨이나 카세트 질감은 테이프 시뮬레이션 플러그인으로 흉내 낼 수 있습니다. 다만 실물을 쓰는 맛은 따로 있어서, 영화 속 장면처럼 직접 만지고 싶어서 실물을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무리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볼게요. 침대에 누워 건반으로 기침 소리를 내던 고등학생.

그 장면에서 에뮬레이터 II가 빠졌다면 페리스는 그냥 꾀병 부리는 아이였을 겁니다. 8천 달러짜리 샘플러가 있었기 때문에, 대사 한 줄 없이도 어떤 집 아이이고 얼마나 영리한지가 다 전해졌어요. 워크맨 하나로 퀼의 그리움을, 나그라 하나로 잭의 직업을, 택이 방의 워크맨과 서연의 CDP로 그 시절 분위기를 설명한 것처럼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구석에 놓인 기계가 눈에 걸리면 한 번 멈춰서 찾아보세요. 감독이 왜 하필 그 기계를 거기 뒀는지 생각해보면, 장면이 한 번 더 재미있어집니다.

#영화속장비 #음악장비 #신디사이저 #샘플러 #워크맨 #카세트테이프 #턴테이블 #나그라 #TR808 #D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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