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셋이 시대를 만들었다 — 롤랜드 D-50과 코르그 M1

1987년과 1988년, 1년 사이에 기계 두 대가 나옵니다.

롤랜드 D-50과 코르그 M1. 둘 다 일본 회사가 만들었고, 둘 다 당시로서는 비쌌고, 둘 다 어마어마하게 팔렸습니다. M1은 25만 대가 나가서 당시 기준 역대 최다 판매 신디사이저가 됐어요.

다만 이 둘이 남긴 게 판매량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기계들의 공장 프리셋이 그대로 90년대 대중음악의 소리가 됐습니다.

엔야의 곡에서 들리는 그 뜯는 현, 마돈나의 「Vogue」와 로빈 S의 「Show Me Love」에 깔린 그 피아노와 오르간. 전부 기본값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도 안 깎은 소리가 차트를 채운 겁니다.

① 1987년의 문제 — 램이 너무 비쌌다 💰

D-50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그 시절의 제약부터 봐야 합니다.

당시 샘플러는 있었습니다. 실제 악기를 녹음해서 재생하면 됩니다. 문제는 램 가격이었어요. 악기 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담으려면 메모리가 엄청나게 필요한데, 1987년에 그건 돈이었습니다.

반대쪽에는 순수 디지털 합성이 있었습니다. 야마하 DX7 같은 FM 방식이요. 메모리는 거의 안 쓰지만, 실제 악기처럼 들리게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롤랜드 엔지니어들이 여기서 흥미로운 판단을 합니다. 악기 소리를 흉내 낼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 어디인가를 따져본 거예요.

답은 어택이었습니다. 소리가 시작되는 그 짧은 순간. 피아노의 망치 소리, 기타 픽이 현을 스치는 소리,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 사람이 악기를 구별하는 단서가 대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소리가 지속되는 구간은 생각보다 단순해요.

② LA 신서시스 — 앞만 샘플로 ✂️

그래서 나온 게 LA(Linear Arithmetic) 신서시스입니다. 구조가 이렇습니다.

🔹 어택 구간 — ROM에 담긴 47개의 어택 샘플 중 하나를 재생합니다

🔹 지속 구간 — 그 뒤를 전통적인 감산 합성으로 만듭니다. 톱니파와 펄스파를 필터로 깎는 방식이요

🔹 둘을 이어 붙입니다 — 앞은 진짜 녹음, 뒤는 합성

메모리가 비싸니까 제일 중요한 앞부분에만 샘플을 쓴 겁니다. 뒤는 계산으로 만들고요.

여기에 지속 구간에 섞을 수 있는 질감 샘플도 몇 개 넣었는데, D-50 특유의 그 넓고 공기 많은 느낌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덤으로 하나 더 있었습니다. D-50은 리버브·코러스·딜레이를 기계 안에 넣은 초기 상업 신디사이저 중 하나였어요. 그전까지는 랙 이펙터를 따로 사서 물려야 나오던 소리가, 건반 하나에 다 들어간 겁니다.

싸게 만들려고 한 타협이 새로운 음색을 만들어냈습니다. 순수 샘플러도 아니고 순수 합성도 아닌, 그 사이의 소리가요.

롤랜드 D-50. 1987년, 미국 판매가 1,895~2,095달러

롤랜드 D-50. 1987년, 미국 판매가 1,895~2,095달러 / 출처: Kimi9 / CC BY 3.0 via Wikimedia Commons

③ 프리셋을 누가 만들었나 🎨

여기가 이 이야기에서 제일 안 알려진 부분입니다.

D-50의 공장 프리셋은 에릭 퍼싱과 에이드리언 스콧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프리셋들에 붙은 이름이 그대로 90년대 음악 용어가 됩니다.

🔹 Fantasia — 나중에 제너럴 미디 규격에 「New Age Pad」로 편입됩니다

🔹 Digital Native Dance

🔹 Staccato Heaven

🔹 Pizzagogo — 현을 뜯는 듯한 소리

🔹 Glass Voices

🔹 Living Calliope

Pizzagogo가 어떤 소리인지는 한 곡만 들으면 바로 아실 겁니다.

▶ Enya - Orinoco Flow — 곡 전체를 끌고 가는 그 뜯는 소리가 D-50 프리셋입니다

이 곡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짧고 통통 튀는 현 소리. 에릭 퍼싱이 만든 프리셋을 어택만 강조해서 쓴 겁니다. 곡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한 소리가 공장 기본값이었어요.

더 놀라운 건 Fantasia가 제너럴 미디 규격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 이후에 나온 GM 호환 기기는 전부 이 소리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Soundtrack」, 「Atmosphere」, 「Nylon Atmosphere」도 마찬가지고요.

한 기계의 프리셋이 업계 표준 음색 목록이 된 겁니다.

④ 그리고 1년 뒤, M1 🔁

D-50이 자리를 잡자마자 코르그가 M1을 냅니다. 1988년이었어요.

M1은 D-50의 방식 — 샘플 위에 신서시스를 얹고 이펙터를 통과시킨다 — 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몇 가지를 더 밀어붙였어요.

🔹 4MB의 16비트 PCM ROM — 당시로서는 큰 용량입니다. 멀티샘플 100개 + 드럼 44개

🔹 8파트 멀티팀브럴 — D-50은 2파트였습니다

🔹 8트랙 시퀀서 내장 — 이게 결정적입니다

🔹 이펙터 11종 — 리버브, 딜레이, 페이저, 트레몰로, 익사이터, 앙상블, 오버드라이브, EQ, 코러스, 플랜저, 로터리 스피커

소리 목록도 당시 주류 음악에서 잘 안 쓰던 것들을 넣었습니다. 시타르, 칼림바, 윈드 차임 같은 것들이요. 어느 매체는 M1 소리를 "이상하리만치 사랑스럽게 삐뚤어져 있다 — 하나하나가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합성음처럼 들렸다"고 표현했습니다.

만드는 과정도 재미있습니다. 코르그 회장 츠토무 카토와 아들 세이키가 "우리 신디사이저는 전 세계에서 같은 소리를 써야 한다"고 정합니다. 그전까지는 시장별로 다른 소리를 넣어 팔았거든요. 그래서 국제 팀을 꾸려 음색을 개발했습니다.

그중 깊은 병 부는 소리를 만들려고 큰 사케 병에 대고 팬플루트를 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코르그 M1. 1988~1995년 생산, 25만 대 추정

코르그 M1. 1988~1995년 생산, 25만 대 추정 / 출처: Warren B. /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⑤ 시퀀서가 바꾼 것 🎛️

M1이 25만 대나 팔린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시퀀서입니다.

M1 하나에 소리도 있고 드럼도 있고 녹음 장치도 있었습니다. 스튜디오 없이 곡 한 곡을 통째로 만들 수 있게 된 겁니다. 어느 매체는 이 점을 M1 성공의 핵심으로 봤습니다. DAW가 보급되기 전이었으니까요.

이게 왜 큰 변화인지 감이 안 오실 수도 있는데, 그 전 상황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곡 하나를 만들려면 신디사이저, 드럼 머신, 시퀀서, 멀티트랙 레코더, 믹서, 이펙터가 각각 필요했습니다. 각각 돈이고 각각 공간이고 각각 연결 작업이었어요.

M1은 그걸 건반 하나에 넣었습니다. 워크스테이션이라는 말이 이때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무대 풍경도 바뀝니다. 그전까지 건반 연주자는 악기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MIDI가 보급되고 이런 기계가 나오면서 건반 한두 대만 놓고 서기 시작합니다. 대개 D-50에 DX7이나 M1을 하나 더 얹는 조합이었어요.

⑥ 프리셋이 차트를 점령하다 📻

이제 소리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M1의 피아노와 오르간 프리셋이 90년대 하우스의 기본 재료가 됩니다.

▶ Madonna - Vogue — 곡을 지탱하는 피아노 스탭이 M1입니다

▶ Robin S - Show Me Love — 그 오르간 리프. 하우스에서 가장 많이 복제된 소리 중 하나입니다

「Show Me Love」의 오르간은 M1의 Organ 2 프리셋입니다. 이 소리 하나로 만들어진 곡이 그 뒤로 몇백 곡은 될 겁니다.

▶ SNAP! - Rhythm Is A Dancer — 유로댄스 쪽에서의 M1

그리고 훨씬 나중 사례도 있습니다.

▶ Bon Iver - Beth/Rest — 일부러 80년대 워크스테이션 소리를 가져다 쓴 경우

이 곡이 재미있는 건, 2012년에 일부러 그 시절 소리를 골라 썼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촌스럽다"고 여겨지던 음색이 20년이 지나 표현 수단이 된 거죠.

⑦ 왜 다들 기본값을 썼을까 🤷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프로 뮤지션들이 왜 프리셋을 그냥 썼을까요.

이유가 몇 개 겹칩니다.

🔹 깎기가 어려웠습니다 — D-50은 패치 하나가 톤 2개, 톤 하나가 파셜 2개로 되어 있고, 파셜 배치 구조가 7가지입니다. 작은 화면으로 이걸 편집하는 건 고행이었어요. 외장 프로그래머(PG-1000)를 따로 사야 할 정도였습니다

🔹 프리셋이 이미 좋았습니다 — 에릭 퍼싱 같은 사람이 시간을 들여 만든 음색입니다. 급하게 깎은 것보다 나을 가능성이 높았어요

🔹 다들 그 기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 25만 대가 팔렸으니, 그 소리가 익숙한 게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그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 시간이 없었습니다 — 이건 지금도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기계 한 대의 기본값이 한 시대의 음색이 됐습니다. 좋은 일이었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그 덕에 90년대 초 곡들이 서로 비슷하게 들린다는 지적도 있고, 반대로 그게 그 시대의 인장이 됐다는 평가도 있어요.

⑧ 둘의 운명이 갈린 지점 ⚖️

D-50과 M1은 1년 차이인데 이후가 다릅니다.

D-50은 1987년에 나와서 DX7의 인기가 꺾이던 시점을 정확히 파고들었습니다.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디사이저가 됐어요. 그런데 그 자리를 1년밖에 못 지킵니다. 이듬해 M1이 나왔으니까요.

롤랜드는 1989년에 D-70을 냅니다. 디지털 합성부를 빼고 더 긴 샘플을 넣었고, D-50에 없던 어쿠스틱 피아노도 들어갔습니다. 필터와 이펙터도 확장됐고요. 사양은 분명히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M1을 못 따라잡습니다. 롤랜드의 다음 플래그십이 되지 못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양 문제라기보다 M1이 이미 워크스테이션이라는 자리를 차지해버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건 더 좋은 신디사이저가 아니라 곡을 끝까지 만들 수 있는 기계였고, 그 자리는 시퀀서를 넣은 쪽이 가져갔습니다.

D-50의 합성 엔진은 다른 데서 이어집니다. 롤랜드의 JV·XP 시리즈로요. 기계는 자리를 뺏겼지만 소리 만드는 방식은 계속 팔린 셈입니다.

⑨ 지금 다시 듣는 소리 ✨

두 기계는 지금도 돌아다닙니다. D-50은 상태 좋은 개체 값이 꽤 유지되는 편이고, M1은 여전히 흔합니다.

그리고 두 회사 모두 소프트웨어로 되살렸습니다. 코르그는 2005년에 레거시 컬렉션으로 M1을 냈고, 롤랜드는 2017년에 D-05라는 소형 복각판과 플러그인 버전을 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게 있습니다. 소프트웨어판은 원본보다 사양이 좋습니다. M1 소프트웨어는 동시발음이 256, 원래 기계는 16이었어요. 램 걱정도 없고 노이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 플러그인을 사는 이유는 사양이 아닙니다. 그 프리셋을 쓰려고 삽니다. 1988년에 국제 팀이 사케 병에 팬플루트를 불어가며 만든 그 100개의 멀티샘플을요.

하드웨어는 소모되지만 소리는 안 그렇습니다. 이 두 기계가 실제로 남긴 건 회로가 아니라 음색 목록이었습니다.

자주 나오는 질문

Q. 지금 실기를 사는 게 의미가 있나요?

A. 소리만 목적이라면 소프트웨어 쪽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실기에는 그 인터페이스로 작업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프리셋 100개를 넘겨가며 고르는 경험과 화면에서 목록을 검색하는 경험은 결과가 다릅니다. 선택지가 제한된 쪽이 오히려 빨리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게 값을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실기를 삽니다. 다만 90년대 기계라 백업 배터리와 LCD 백라이트는 연식만큼 갔다고 보셔야 합니다.

Q. D-50과 M1 중 하나를 고른다면?

A. 성격이 다릅니다. D-50은 질감, M1은 재료에 가깝습니다. D-50은 공기 많고 넓은 패드와 독특한 어택이 강점이고, 종류는 적지만 그 소리가 다른 데 없습니다. M1은 피아노·오르간·드럼까지 다 들어 있어서 곡 하나를 굴리기에 좋고요. 90년대 하우스나 댄스 쪽 소리가 목적이면 M1, 분위기를 만드는 게 목적이면 D-50입니다.

Q. LA 신서시스가 지금도 쓰이나요?

A. 이름 그대로는 아니지만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샘플로 어택을 만들고 뒤를 합성이나 루프로 잇는 방식은, 램이 충분해진 뒤에도 계속 쓰였습니다. 롤랜드의 JV·XP 계열이 이 엔진을 이어받았고, 지금의 롬플러 계열 음원들도 원리상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메모리 절약을 위한 타협이 방법론이 된 경우예요.

Q. 프리셋을 그대로 쓰는 게 나쁜 건가요?

A. 이 글에 나온 곡들이 답이 될 것 같습니다. 「Orinoco Flow」도 「Show Me Love」도 기본값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소리를 어디에 놓느냐였어요. 다만 지금은 조건이 다릅니다. 그때는 그 기계를 가진 사람만 그 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같은 플러그인을 다들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프리셋을 그대로 쓰는 건 그때보다 조금 더 불리한 선택이긴 합니다.

마무리

1987년과 1988년, 1년 사이에 나온 두 대.

이 기계들이 남긴 건 사양표가 아니었습니다. Pizzagogo와 Organ 2였고, Fantasia였습니다. 한 회사의 공장 기본값이 제너럴 미디 규격에 들어가고, 다른 회사의 오르간 프리셋이 하우스의 기본 재료가 됐어요.

재미있는 건 이게 다 제약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램이 비싸서 어택만 샘플로 썼고, 화면이 작아서 다들 프리셋을 그냥 썼습니다. 그 타협들이 모여서 한 시대의 소리가 됐습니다.

지금은 램도 싸고 화면도 큽니다. 그런데 그때 만들어진 소리 목록은 아직도 팔리고 있어요. 기계를 오래 남기는 건 성능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소리라는 걸, 이 두 대가 꽤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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